어릴 적부터 두려운 것이 한 가지가 있었다. 그건 어딘가에 부딪친다는 것에 대한 공포심이다. 작은 부딪침으로도 뼈가 부러져 깁스를 해야 하는 상황이 오고, 운 좋게 깁스를 하지 않더라도 뼈에 생기는 변형은 막을 수 없었다. 실금으로 갈라지면서 생긴 뼈의 변형은 올곧아야 하는 본래의 모양과 달리 부딪친 자리마다 울퉁불퉁 변해갔다. 가장 취약한 분위였던 하체는 제 아무리 조심하여 어딘가에 부딪친다는 것은 순식간에 일어나는 일이기에 어릴 때는 하루가 멀다 하고 다치기 일쑤였다. 거기에 대한 스트레스는 매일매일 이어졌다. 모든 게 조심하지 못한 내 탓 같아서 자괴감이 들어 우울함에 빠진 나날도 있었다.
언제 다시 다칠지 모른다는 생각에 늘 불안했다. 다칠 수도 있다 생각하고, 다친 게 내 잘못이 아니라 생각해도 마음이 녹록지 않았다. 보통의 어린이라면 성장 속도에 맞춰 몸에 회복 속도가 빠르다. 회복 속도가 빠른 만큼 뼈에서 나오는 ‘진’이라는 뼈를 붙게 해주는 성분이 많이 나와 금이 간 뼈를 붙여준다고 한다. 내 경우는 그 성분 생산량이 현저하게 떨어졌다. 이 또한 내가 가진 질병의 특징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보통 4주가 걸릴 것도 8주라는 두 배의 시간이 소요되었고 그만큼 깁스하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뼈를 보호해줄 근육도 약해지고 뼈도 더욱 약해지니 깁스를 푼 후에도 다친 부위가 다시 다치는 악순환이 시작된다. 악순환은 몇 년이고 이어졌다. 이러한 악순환은 빛나야 할 10대의 일상을 순식간에 앗아갔다. 그렇다 보니 어린 시절부터 나에게는 부딪친다는 것에 대한 공포감은 무서움을 넘어선 두려움에 가까웠다.
내가 5학년쯤 되는 나이가 되었을 때 일이었다. 그날은 가까운 친척끼리 모여 나들이를 가자고 삼촌네, 이모네 식구들이 우리 집에 모이는 날이었다. 어른들은 나들이를 갈 채비를 하느라 분주하게 집안을 돌아다녔고, 나들이를 동행하는 어린이는 나와 삼촌네 막내아들이었다. 초등학교를 다닐 때 등교를 하지 않았던 날이 많았던 나는 집에 있어서 당연히 함께 가는 것이었고, 나와는 한 살 터울 차이가 나는 삼촌 막내아들은 갑작스럽게 감기가 와서 등교를 하지 않아 삼촌을 따라왔다고 했다. 늘 언니와 동생, 사촌 오빠까지 여럿이 있을 때 서로 말하겠다며 시끄러웠던 날들과 달리 둘이 있으니 묘한 어색함이 흘렀었다. 옛날부터 나는 주위 사람들을 어색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었다. 알게 모르게 가족들은 항상 나를 요주인물처럼 조심, 조심 또 조심이라는 프레임에 넣어 두고 보호하셨기에 덜 다칠 수 있었지만 그만큼 주위에 사람이 다가오지 못하기도 했다. 사촌 동생도 마찬가지로 어른들의 주의 속에서 나와 함께 거실 소파에 앉아있었다. 그 나이 또래의 남자아이들은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였기에 어른들의 주의와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 타 뭐가 그리 즐거운지 혼자 깔깔 거리며 웃기도 하고 소파에서 방방 뛰어놀다 그만 사건이 일어났다.
방방 뛰어놀다 뒤집어져서 누워 놀기를 반복하며 발장난을 하던 사촌동생은 제 발이 움직이는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나의 허벅지 위로 두 발을 떨어트렸다. 나 혼자만의 사고가 아닌 물질적인 타인의 힘이 몸에 직접 닿아 생기는 아픔은 당시에 처음 경험했다. 놀람과 충격은 아픔만큼이나 크게 다가왔다. 처음으로 나로 인해 다친 것이 아닌 날이었지만 아픈 건 똑같았다. 발뒤꿈치에 부딪친 다리는 아팠고, 다리가 잘못된 것이 느껴지는 순간 서러웠다. 뼈가 부러지는 순간은 아픔과 함께 이가 딱딱 부딪칠 만큼 아픔으로 인하여 몸이 오싹해진다. 침대에 옮겨진 나는 엉엉 소리 내지도 못하고 삐죽거리는 입으로 눈물만 흘리며 괜찮냐는 물음에 아무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그날의 즐거웠던 나들이 계획은 나로 인해 무산되었다.
“괜찮아?”라고 물을 때 “응, 괜찮아.”하고 말할 수 있는 작은 부딪침, 가벼운 타박상이 나에게는 없었다.
가끔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는 작은 부딪침은 나에겐 <사고> 같은 일이 되어 돌아올 때가 있다. 타인에게 공감받지 못하는 아픔은 꾀병이나 엄살로 보이기 쉽다. 때로는 보이지 않는 상처가 보이는 상처보다 아프고 위험함에도 사람들은 타인의 우울증 같은 보이지 않는 마음의 병은 대수롭게 않게 여기기도 한다. 손가락 끝에 박힌 가시도 보이지 않는 마음의 병도 뼈가 부러지는 아픔도 저마다 아픔의 강도는 다르지만 본인이 겪는 아픔은 같았다. 어쩌면 세상에 괜찮지 않은 사람은 별로 없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괜찮나 묻는 순간들 속에서 나는 한 번도 괜찮은 적은 없었다. 자주 겪다 보면 무뎌지는 것처럼 아픔 또한 과정이 익숙해질 뿐 아픈 게 안 아파지진 않았다. 어릴 적에는 아픈 걸 참으면 다음 날이면 아프지 않은 줄 알았다. 당장에 아픈 걸 말하는 게 무서워서 참고, 또 참으면 나아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 아파진다는 여러 번 겪은 후에야 차츰 깨달았다. 그걸 깨달은 후에는 괜찮다고 말하는 대신 괜찮지 않다고 말하는 편을 선택했다. 있는 그대로라고 할지라도 처음에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 자체가 굉장히 어려웠다.
“괜찮지 않아요.”
이 한 마디가 마치 내가 정말 아픈 것임에도 꼭 거짓말을 하는 아이처럼 말하는 게 부끄러웠다. 병원에 실려 가더라도 의사 선생님은 정확한 진찰을 위해 어디가 아픈지 물어보는 것에 제대로 대답하지 않는다면 상처는 더욱 악화되어 오로지 아픔을 견디는 건 본인 몫이 된다. 요즘 시대에 아픔을 참는 건 세상에서 가장 미련한 짓이라고 의사 선생님들은 누누이 말했다. 몸이든 마음이든 아픈 건 부끄러운 것도 창피한 것이 아니기에 내가 괜찮지 않다는 것에 대해 타인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 애써 참고, 숨기면서 스스로 위로하는 대신 치료받을 수 있도록, 위로받을 수 있도록 말해본다. 상처가 곪고, 더 아프기 전에 미리 말해본다. 가끔은 스스로 다짐하는 위로보다는 타인의 음성이 나를 더욱 위로할 때가 있다. 자신에게 솔직해졌을 때 비로소 쉽게 말할 수 있는 말이 하나쯤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