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입사원들이 겪는 열병 같은 것
대학생인 나에게 ‘회사’라는 울타리는 무엇이었을까? 지금 돌이켜보면, 그것은 우수한 인재들이 살아가는 한 차원 높은 수준의 사회였다. 회사에 이미 다니고 있는 직장인들은 나보다 조금 더 우월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교양 수준도 한 단계 더 상승한다고 믿었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일종의 신분 제도를 떠올린다면 적절한 비유일 것 같다. 나의 일에 대한 지식도 있고, (월급도 두둑해서 소고기도 마음껏 먹고) 그것은 학생이었던 내게 새로운 신분처럼 다가왔다. 나의 대학 전공은 ‘화학공학’이었다. 나에게 있어 전자/전기 업계에서 일한다는 것은 가혹한 현실이었다. 마치 대학 시절엔 듣고 싶은 과목만 수강 신청해서 들었다면, 회사에서는 싫어하는 과목만 수강 신청해 놓은 느낌이었다. 누군가 나를 골탕 먹이려고 말이다.
전공과 업종이 다르다 보니, 내가 알지 못하는 분야에 대해 A부터 Z까지 학습해야 했다. 물론, 화학공학 전공을 살렸다면 ‘기름집’이라 불리는 정유/석유화학 업계로 입사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학업 성적이 평범했던 나로서는 전공을 살리는 게 오히려 두려웠던 것 같다. 아니, 나의 부족한 전공 실력이 들통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기도 했다. 아무튼 나는 입사를 하게 되었다. 회사 생활 중 제일 '꿀'이라는 신입사원 교육을 거쳐 현업에 배치가 되었다. 부서장과의 첫 면담에서 패기를 보여주고 싶었던 나는 이렇게 말했다.
"어디든 제가 꼭 필요한 곳에 배치해 주십시오." (a.k.a. 신입사원의 패기)
그날 이후, 아직 양산도 시작하지 않은 Set-up Line에 배치가 되었다. 그곳은 제품을 생산하기 위한 장비의 안정화와 수율을 끌어올려야 하는 Mission을 가지고 움직인다. 군대에 비유하자면 최전방이다. (...) 그리고 현장에 배치되자마자, 12시간씩 근무하는 2교대를 하기 시작했다. 인력이 부족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렇게 3개월가량 친구, 가족, 연인과 동떨어진 신입사원 시절을 보냈다. 신입사원으로서 열정은 넘쳤지만, 업무를 하면서 상대적 박탈감에 좌절하고 말았다. 내가 하는 일은 잡무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장비의 부품을 나르거나, 장비에서 나오는 부산물들을 폐기하는 작업, 그리고 장비의 부자재를 단순 교체하는 작업들이 그것이었다.
‘내가 생각한 직장인의 삶은 이게 아닌데…’
그때 나에게 현타가 왔다. 그것도 아주 씨게.
어쩌면 내가 이상적으로 생각한 직장 생활과의 괴리가 컸는지 모른다. 나의 지난 4년 동안의 대학생활이 무의미하게 느껴졌고, 동시에 합격한 다른 회사도 생각이 났다. '탈출'을 외치며 새로운 회사에 이력서를 지원하기도 했다. 나에게는 사춘기 이후 가장 큰 내적 방황의 시기였던 것 같다. 하지만, 아쉽게도 지원한 새로운 회사의 합격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지금의 선택을 번복할 수 없다고 느낄 때쯤, 나의 선택을 잘했다고 합리화를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누군가 나를 칭찬하고 격려하길 내심 바라고 있었다. 더 나아가 포기하고 다른 길을 가기엔, 지금의 선택을 후회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난 그때부터 점점 회사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당신에게도 현타가 온 적이 있는가? 아직 어제 그 일이 머릿속에서 잊히지 않는가? 현타는 당신에게 새로운 무언가를 얻게 할 것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당신에게 이야기할 글이 생긴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