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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하 Nov 16. 2023

그냥 누워만 있고 싶은데

나를 무겁게 하는 것으로 벗어나는 나만의 방법 + 오늘의 응원

남들보다 조금 민감한 성향의 사람들, 내향적인 사람들은 자기 검열과 생각을 많이 한다. 내가 그렇다. 높은 기준에 한참 부족한 나, 일에 지쳐서 집에 와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 우울한 감정에 허우적거리는 나, 속상하고 기분 좋지 않은 일이 있었는데 꼬리에 꼬리를 물고 그 일로 시작한 부정적인 상상의 나래를 펼쳐 온통 부정적인 세상에 서 있는 나.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묻는 질문에 꼭 빠지지 않는 것 중 하나는 산책이다. 산책을 왜 좋아하느냐 묻는 이에게 “산책은 저를 살게 해 줬어요.”라고 답한다. 번아웃과 무기력에 허우적거리며 출퇴근을 하던 어느 날 퇴근하고 집에 가려는데 답답하고 마음에 화가 가득했다. 내가 해결할 수 없는 수준의 어려움과 압박감에 눌려 나 자신이 콩알만 해졌지만 할 일은 태산과 같아서였을지도 모른다. 너무 답답하니까 좀 걷다가 힘들면 버스를 타야겠다고 생각했고, 귓가에는 나 대신 화를 내주는 것 같은 강렬한 음악이 흘러나오는 상태로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50분 정도 걸으니 약간 체온이 올라가서 살짝 더운 느낌이 나면서 기분은 훨씬 나아졌고, 작은 언덕을 올라서니 멀리 노을 지는 하늘이 보였는데 괜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날 이후로 나의 퇴근길은 뚜벅이였다. 화남, 우울함, 짜증 남, 분노와 같은 어두운 색의 감정들이 일하는 과정에서 덕지덕지 나에게 붙어있는 것들을 퇴근길을 걸어가며 하나씩 길거리에 버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하나씩 버려가며 집에 도착해 현관문을 열면 퇴근했을 때의 어두운 감정의 스티커들이 붙어있는 나는 없고 기운은 없어도 저녁을 챙겨 먹고 나아진 기분으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내가 있었다. 


퇴근길의 산책은 안타깝게도 퇴사날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30분 이상 걷는 것도 힘들어 벤치에 앉아서 쉬었다가 가야 할 정도의 몸상태가 되어버리니 산책은 커녕 출퇴근도 간신히 유지하는 정도였다. 그렇게 퇴사를 하고 한두 달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자고 싶을 때 잠들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고, 먹고 싶을 때 먹고, 먹고 싶지 않을 때는 먹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산책을 시작했다. 


늘 지쳐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던 시간이 지나가니 아침에 창밖의 풍경이 보였다. “아, 오늘도 하늘이 맑네. 공기가 시원하다. 산책을 가볼까.” 싶은 마음이 절로 들었다. 시체처럼 두어 달을 누워있으니 3-40분만 걸어도 금세 피곤해지는 것 같았다. 그런 피곤함에도 아침에 만난 산책길은 나에게 많은 것을 보여주었다. 하늘의 구름들, 따스하게 내리쬐는 햇빛, 햇빛을 받고 바람에 살랑거리는 이름 모를 들꽃과 들풀들, 키가 높이 솟은 풍성한 나무들, 바깥 놀이를 나온 어린이집 아가들과 선생님들, 나처럼 산책하는 사람, 강아지와 걷는 사람, 아이와 함께 천천히 걷는 사람, 유모차를 밀고 있는 조금 지쳐 보이는 누군가, 큰 가방을 메고 빠르게 걸어가는 학생처럼 보이는 사람 등등 집에서 갇혀있어서 보이지 않았던 만날 수 없었던 장면들이 매일의 산책에 나타났다. 매일의 산책으로 한 시간은 여유롭게 산책하며 만난 그네의자에서 멍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멍의 시간을 갖는 것뿐인데 왜 잘 산다는 기분이 드는 걸까?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다, 김신지>

그렇게 멍을 때리고 앉아있다 보면, 조금은 빠르게 뛰던 심장박동이 서서히 가라앉고 걷고 있을 때  보이지 않는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산책이 신이 난 강아지의 씰룩거리는 엉덩이와 총총대는 발걸음, 아이들이 “선생님, 이거보떼요, 완전 이뿌죠.”라고 서로 자신이 찾은 나뭇잎이 예쁘다고 주장하는 귀여운 말투들, 바람에 나뭇잎이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만나는 고요함이 있다. 그렇게 멍을 때리다 보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생각들이 핸드폰 메모장에 입력된다. 산책하고 멍 때리기는 그렇게 나의 숨통을 틔워주고 나를 밖으로 꺼내주었고 시선을 다양하게 만들어주었다. 


나는 회사 근무시간에도 인간에 대한 환멸이 느껴지는 순간이면 종종 편의점으로 달려가 1,000원짜리 스트링 치즈를 산다. 그걸 양손으로 비비며 말랑말랑하게 만들어서 결결이 찢어먹으며 회사 뒷골목을 걷다가 돌아온다. 큰 위로는 아니지만 즉각적인 위로다. 꼭 필요한 순간, 꼭 필요한 강도의 위로다.
<치즈 맛이 나니까 치즈 맛이 난다고 했을 뿐인데, 김민철>

나 자신을 부정적인 감정이나 상황에 말려 떠내려가지 않도록 하는 즉각적인 위로. 나에게는 산책이다. 김민철 작가의 문장처럼 회사에서 협력사의 무례함에 머리끝까지 화가 났고 화난 감정을 동료들에게 옮기기 싫어서 무작정 밖으로 나왔다. 회사 앞에 경의선 숲길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씩씩거리며 나무들이 양 옆으로 잔뜩 채우고 있는 길을 걸으니 감정이 조금씩 버려지는 느낌이 들었다. 완전 깨끗이 회복하지는 못했어도 적어도 누군가에게 부정적인 기운을 흘리지 않을 수 있으니 그것으로 충분했다.
최근에 감기가 독하게 걸려 3주간 골골거렸다. 어떤 때에는 기침이 심해서 잠도 편히 못 자고 어떤 날은 두통과 목의 염증으로 인한 통증으로, 어떤 날은 몸살처럼 몸의 구석구석이 아파서 약을 달고 살았다. 아파도 기한 내에 해야 할 일들이 있어 책상 앞에서 앉아 컴퓨터를 마주했다. 시간은 두 배로 드는 것 같지만 일의 결과는 전보다 적었다. 몸이 아프니 집중력도 떨어지고 에너지도 부족해서 비효율의 끝판왕 상태였지만 일을 꾸역꾸역 해냈다. 미련했다. 대략 3주를 자고, 먹고(약을 먹으려 매 끼니를 꾸역꾸역 챙겨 먹는 것도 곤욕이었다), 일하고의 딱 세 가지만 하고 정말 필요한 때에만 집 밖을 다녀왔다. 쓰레기를 버리거나 마트에 장을 보거나 취소할 수 없는 일정을 다녀오는 등의 최소한의 활동만 했다. 점점 바닥과 한 몸이 되는 것 같았다. 신체뿐 아니라 정신과 마음도 바닥에 눌어붙어서 일어날 수 없다고 역시 나는 글러먹었다고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아주 조그마한 바닥의 스티커 같은 존재라 생각하며 얇고 작아져버렸다. 그때 창 밖의 하늘이 산책을 가자고 잠시만 나와서 걷자고 불렀다. 아 맞다, 산책. 무더운 여름날, 햇빛이 뜨거워 아침 산책은 무리라고 미루어두었던 산책을 오랜만에 다녀오니 바닥에 눌어붙었던 그 아이는 약기운에 헤롱거리지만 기운을 내보려 버둥거리는 중이다. 


누구한테 마음을 쉬이 말하지 못하는 나, 나에게 엄격한 나이지만 나 스스로가 부정적인 생각과 불안을 멈추고 나에게 선물하는 즉각적인 위로의 시간과 방법을 꼭 하나씩은 마련해 둔 것이 그저 누워있고 싶은 나를 일으켜 세운다. 작고 소소한 나만의 방법을 만들어 두자. 그중 한 가지는 나를 조금 더 잘 살고 있다는 기분을 매 번 선물해 줄 거다.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제어할 수는 없겠지만
그 일들로 인해 약해지지 않기로 마음먹을 수는 있다.”
- 마야 얀젤루(Maya Angelou), 시인이자 메모리스트, 시민권 운동가



[오늘의 응원]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행동을 찾아보자. 산책, 좋아하는 간식 먹기, 기분이 전환되는 음악 듣기, 좋아하는 장소에 가기, 멍 때리기, 하늘 사진 찍기 등의 나만의 즉각적인 위로를 써보자. 한 가지여도 좋고 여러 가지여도 좋다. 핸드폰 메모장에 저장해 두고 힘들어서 무너져 내릴 때, 누워서 일어나고 싶지 않을 때, 숨어버리고 싶을 때 꺼내어 보자. 핸드폰 메모장에 적어둔 행동을 바로 실행하자. 바로 실행할 수 있게 명령어로 적어두자. 지금 일어나 산책해!  좋아하는 간식을 사러 편의점으로 가! 와 같이. 한두 번의 경험은 생각보다 큰 기분 전환과 나를 위한 무언가를 했음에 조금 더 잘 살고 있는 기분을 만나게 해 줄 것이고, 그 경험으로 우리는 또 일어날 수 있을 거다. 

누워있어도 괜찮다. 당신은 나처럼 일어날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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