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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하 Nov 09. 2023

나는 나를 잘 알고 있을까?

내향인 나 알아차리기

“당신은 자신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자신을
양으로 측정하지 않고 질로 측정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 센서티브, p9 -


일하는 동안 해외 출장이 많으면 1년에 7번 정도, 적으면 3-4번 정도 다닐 때가 있었다. 대체로 도움이 필요한 지역을 다니느라 이동시간만 30시간이나 48시간 정도 걸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동남아 지역에서 에어컨이 없어 선풍기만 틀고 있거나 처음 보는 크고 작은 벌레들을 만나는 일이 다수였고 아프리카에서는 물이 노란 경우, 빗물을 받아두지 않으면 물을 사용하지 못하는 곳도 있었다. 그런 지역에서 매일 땀을 뻘뻘 흘리며 현장에 다녀오고 숙소에 돌아와 업무일지를 적고 출장비 정산을 하고 다음 날 일정을 준비하면 금세 9-10시가 되었다. 더운 나라는 사람들이 하루를 빨리 시작하고 이른 퇴근을 하기에 기상시간은 한국보다 이르게 서둘러 움직였어야 했다. 그때에는 주어진 과업을 처리하느라 바빠서 내가 괜찮은지, 안 괜찮은지 살펴볼 시간과 여유와 생각 자체를 할 수가 없었다. 출장 기간마다 깊은 잠을 자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도 없었고, 해외 출장이니 피곤할 수밖에 없다고 힘듦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6년 넘게 저런 생활을 계속해왔고 남들도 다 나처럼 바쁘고 힘들게 살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며 그래도 나는 의미 있는 일, 좋아하는 일을 하니까 더 열심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에게 주어진 기회를 감사하게 소중히 여기며. 


언제부턴가 마른 우물에서 물을 길어 올리려 바닥을 벅벅 긁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일은 해도해도 끝이 없고 회의도 해도해도 끝이 없고 그냥 이렇게 굴러가다가 인생이 끝나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도 들었다. 비슷한 시간에 출근을 했음에도 왠지 모르게 그날 따라 너무 기운이 없고 피곤하고 그저 드러눕고 싶다는 생각만 잔뜩 했었다. 나도 남들처럼 번아웃이 온 건가 싶었다. 하지만 이것도 나에게만 찾아오는 것이 아니니 그냥 일하다 보면 지나가겠지라고 생각했었고 남들도 다 이만큼씩 힘들게 일하는데 나라고 힘들지 않게 일할 수 있을까 싶어서 꾸역꾸역 참아내며 회사를 다녔다. 어느 날은 두통이 하루 종일 있었고 고작 40분 남짓한 출근 길이 힘들어 잠시 벤치에 앉아서 쉬고 갈까 생각한 적도 있었다. 무언가 특별한 이벤트가 있었던 것도 아닌 그저 똑같은 출근길이었는데도 말이다. 


나는 스스로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업무가 주어지면 일정 기간 동안 이만큼은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사람, 책임감이 큰 사람, 주변 사람들을 잘 챙기려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알고 있는 나는 일 중심으로 평가한 나였다. 일을 얼마나 해낼 수 있는지, 얼마큼의 경험과 경력으로 가지고 있는지, 얼마나 많은 것들을 할 줄 아는 사람이고 할 수 있는 사람인지에 대해서만 알고 있었다. 일을 배제하고 내가 나를 위해서 무엇을 해주는지, 몸이 아프기 전에 힘듦은 어떻게 알아챌 수 있는지, 일 외에 무엇을 할 때 진심으로 기쁨을 느끼는지와 같은 나의 상태나 마음에 대해서는 남들을 배려하고 살펴보는 것만큼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힘들어하는 것도 나의 부족함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지금 내가 퇴사해 버리면 팀원들이 고생할 것을 알기에 책임감이라는 이름 아래 말 그대로 존버하고 있었다. 


신입 직원들이 들어오고 업무 재배치가 되는 시점에 애니어그램 팀빌딩 워크숍을 한 적이 있었다. 애니어그램 검사 결과를 바탕으로 서로 간 업무 소통을 조금 더 원활하게 할 수 있도록 강사님이 한 사람씩 성향을 분석해 주었는데 우리가 일하는 모습을 CCTV로 지켜본 것처럼 각자의 업무 스타일을 족집게처럼 흉내 내고 설명해서 정말 깜짝 놀랐었다. 강사님이 나와 같은 사람은 조직생활이 쉽지 않은 성향이고 무언가 의견을 내려고 할 때 남들에 비해서 10단계 정도 생각을 더 많이 하기 때문에 조금 시간이 걸려도 기다려주고 어렵게 의견을 내었다면 집중해서 들어줄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었다. 그리고 동료들의 배려가 필요한 예술가형이기에 자유롭고 창의로운 활동이 어려운 조직생활을 하고 있어 스스로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었다. 강사님이 해준 나에 대한 설명에 여러모로 놀랐다. 직관적으로 해결이 가능한 업무에 대해서는 결정이나 말하는 것이 오래 걸리지 않지만 새로운 아이디어나 기획에 관한 것이라던지, 누군가에게 조언을 하거나 피드백을 할 때에는 상대방이 상처받지 않을 수 있는 말들을 고르고 최대한 감정적이지 않게 전달하려고 할 말을 쓰고 고치며 정리해두고 말을 하기에, 나를 대변해 주는 대변가 같아서 괜스레 강사님에게 고마웠다. 전문가가 나의 성향에 대해 정의해 주고 이런 성향은 이런 어려움이 있다고 말해주는 순간 오랫동안 꽉 막혀 있던 체증이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아, 나는 이런 성향의 사람이어서 직설적이고 마구잡이로 밀어붙이는 사람과 일하는 게 남들보다 더 힘든 거였구나. 나만 이상한 사람이 아니었구나.” 그리고 강사님이 꼭 글을 계속 쓰는 것이 나에게 좋다고 덧붙였다. 


문장으로 시작하는 글쓰기, 모닝 페이지를 쓰면서 나도 몰랐던 나의 숨겨진 마음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일로 평가하는 내가 아닌 일을 제외한 있는 모습 그대로의 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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