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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하 Nov 23. 2023

도망치고 숨어버리고 싶을 때, 만난

안전지대를 소소하게 많이 만들어두자

아픈 손가락 같은 사람들이 있다. 착하고 열심히 일하고 성장하고 싶고 잘하고 싶어서 서로 응원하고 다독였던 사람들. 공공의 적이 있어서 더욱 끈끈하고 비스무리한 상처를 한구석에 품고 있어서 똘똘 뭉칠 수밖에 없었던, 그런 시간을 함께했던 동료들이다. 함께 팀으로 일한 시간은 1년 반 정도뿐인데, 만날 때마다 그때가 좋았다, 그때처럼 좋은 팀을 만나는 건 행운이었고 감사한 일이었다고 고백하는 우리다. 

그때에는 다 같이 힘들었고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일을 열심히 하면서 바들바들 온 힘을 다해 버티고 있어 잘 몰랐는데 우리는 꽤나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이었다. 나를 필두로 한 명씩 이직을 하거나 학교로 공부하러 가기 위해 팀을 떠나는 과정은 모두 다 쉽지 않았다. 조금 더 일 해달라는 권유, 타 팀으로의 이직 권유, 다른 포지션 혹은 업무 담당의 전환 등의 권유를 받았지만 대부분이 팀을 떠났다. 그리고 우리는 다 탈출에 성공해서 즐겁게 또 각자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잘 살 수 있을 줄 알았지만, 그렇지 못했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얼굴이 반쪽이 된 친구도 있었고 조금 쉬다가 용기를 내어 이직한 직장에서 스트레스와 업무의 압박감을 이기지 못하고 만나자마자 눈물을 보이며 허우적거리는 친구도 있었다. 친구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아, 우리는 남들보다 조금 더 예민한 사람들이었구나, 그런 우리라서 서로를 더 잘 보듬어줄 수 있었구나.’ 깨달았다. 그리고 그 친구들보다 조금 일찍, 전보다 건강하고 씩씩하게 지내고 있는 내가 친구들에게 꼭 이야기를 해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 퇴사한 지 만으로 1년이 되는 시점에 퇴사 후 1년 동안 한 일과 변화, 느낀 점에 대해 기록을 했다. 그 기록을 쓰는 서두에 이런 말을 썼다. 

“퇴사할 때에는 가장 길고 오래 꾸준히 한 것이 '일' 뿐이라서 나를 나타낼 수 있는 수식어는 어떠한 일에 경험이 있는 사람, 프로젝트에서 어떤 역할을 했던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외에 수식어는 떠오르지도 않았고 생각을 해도 알 수가 없었다. 내가 한 '일' 말고는 나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 무척 당혹스러웠다. 뭐든 1-2개월 끄적거리다 쉽게 관두었던 나는 1년 새 이렇게 변화하고 성장했다. 그리고 나를 표현하는 수식어도 함께 변했다."

안타깝게도 삶에서 일이 차지하는 범위가 8-90%인 생활을 했던 때에는 일에서 무너지면 도망칠 곳이 없었다. 그저 그날 안 좋았던 일을 곱씹고 곱씹으면서 나를 검열하고 반성하고 나무라기만 했지,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메타인지와 같이 나를 조금 더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이성적으로 분석하고 다독이며 정리하는 것과 같은 시간은 커녕 공간도 방법도 에너지도 내게 없었다. 좋아하는 게 무어냐고 물으면 줄줄 말할 수 있었지만 그것들이 나의 '안전지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었다. 

퇴사 후 1년 동안 느리고 천천히 쌓아 올린 나만의 것들은 내가 흔들리고 어려운 순간에 도망쳐서 잠시 숨을 고르고 마음과 감정을 살펴볼 수 있게 하고 어려운 상황에만 집중되어 있는 나의 사위를 밝혀주는 '안전지대(safe zone)'가 되었다. 게임에서도 안전지대에 있으면 공격을 받지 않고, 체력을 보충하거나 무기나 스킬을 재정비하는데, 우리는 안전지대가 필요하다는 것 자체를 알지 못하고 나를 보호해 줄 보호구 하나 없이 여기저기 치이다가 집에 돌아와서 빠끔빠끔 누워서 숨만 쉬다가 그렇게 다시 일어나서 매일을 살아온 거다. 




<작은 성취를 저금하기> 


하나, 어렸을 때, 유치원에 다닐 시절 이모는 집에서 피아노 학원을 하셨다. 그곳에 자주 놀러 가면서 피아노를 가까이했고 꽤 오랜 기간 피아노를 배웠다. 어렸을 때야 피아노로 무엇을 연주하고 싶은 의지나 생각이나 지식이 없으니 선생님이 시키는 것을 그대로 따라갔다. 성인이 돼서 재즈곡들을 접하면서 재즈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오랫동안 했지만 일 년에 평균 5-6번씩 해외 출장을 다니고 야근을 밥 먹듯이 하는 삶에 재즈 피아노는 사치였다. 연습하고 레슨 받는 시간에 집에서 잠을 더 자는 게 중요했다. 새해가 되면서 죽이 되든지 밥이 되든지 해보고 싶은 것을 해보자는 마음으로 피아노 학원에 등록했고 벌써 10개월째 다니고 있다. 자주 연습할 때는 매일 30분 이상 적게 할 때는 2-3일에 한 번씩 한 시간씩 연습을 한다. 한 곡을 완료할 때마다 학원 선생님이 영상을 찍어주시는데 열 한개가 모였다. 어렸을 때처럼 선생님이 몇 번 연습해오라 동그라미를 그려주지도 않고 연습을 하고 오지 않는다고 혼나지도 않지만 레슨을 받을 때 조금씩 진도가 나가는 것도, 버벅거리며 뚱땅거리던 부분을 유려하게 연주하면서 넘어가는 것도, 완곡해서 영상을 받는 것도 작은 성취로 쌓여간다. 내 눈으로 귀로 피부로 와닿게 느끼는 나의 작은 성취다. 그 작은 성취는 오늘도 나를 위해 무언가를 했다는 자존감 저금통에 하나씩 저금하는 든든한 나의 지지대가 되어준다


두울, 문장메모 리추얼과 모닝 글쓰기 리추얼도 마찬가지이다. 문장메모 리추얼은 책을 읽거나 혹은 뉴스레터, 영상, 기사, 음악의 가사 등등 어디에서든 와닿는 문장을 메모하는 것인데 1년 4개월 정도 지속했더니 상자에 가득 쌓였다. 언젠가부터 문장을 기록하고 문장으로 시작하는 일기도 쓰고 있는데 쓰다 보니 아주 작은 주제이지만 나의 생각을 정리하게 되었고 두꺼운 노트 한 권을 다 채웠다. 가끔씩 들여다보면 내가 이렇게 많은 문장을 모으고 글을 썼구나 하는 성취감이 든다. 모닝 글쓰기도 마찬가지이다. 아티스트 웨이에 나오는 내 안의 창의성을 꺼내는 작업이라고 해서 시작했던 모닝 글쓰기였는데 창의성을 꺼내기 이전에 나의 몸 상태, 기분, 마음 상태에 대해 몰랐던 나의 것들이 글쓰기로 쏟아져 나온다. 그렇게 시작된 글쓰기는 매일 아침을 분주하지 않게 시작할 수 있게 해 주었고 나의 상태를 알아차리고 오늘의 일정을 조정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해 준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컨디션이 좋지 않다고 글을 쓰면서 왜 그런가 생각해 보면 이것 때문일까 저것 때문일까 자연스레 글을 쓰게 되고 어떤 날은 명확한 이유를 찾아내기도, 어떤 날은 이유를 찾지 못하기도 한다. 괜찮다. 내가 글을 쓰는 건 방법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늘 하루, 아침 시간을 잘 보내고 싶기 위해서다. 그렇게 컨디션이 좋지 않음을 알아차리면 오늘의 일정을 생각해 보고 무리가 될 것 같은 일정을 조정하거나 오늘까지 하기로 했던 일의 마감일을 조정하고 꼭 중간중간에 나를 위한 시간으로 산책을 하거나 하늘을 보면서 멍을 때리거나 좋아하는 카페의 음료를 마시러 갈 것을 다짐한다. 이렇게 나를 돌보는 안전키를 곳곳에 심어두자고 글을 쓰고 하루를 시작하면 순간순간 다짐했던 것들이 떠올라 자연스레 실천하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그렇게 하루를 살고 매일 글 쓰는 페이지가 쌓이면 오늘도 나를 위한 무언가 한 가지 이상을 해주었다는 성취감을 느낀다. 


작은 성취감들이 쌓이는 순간들이 매일매일 혹은 한 주에 3-4일 이상씩 쌓이면 그것들은 일상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는다.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하고 때가 되면 밥을 먹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인 것처럼, 책을 읽고 메모하는 것, 글을 쓰는 것, 피아노 연습을 하는 것이 애써서 시간을 내어 이것을 해야만 한다, 나에게 좋은 것을 해주어야 한다는 식의 목표 달성이 아닌 목이 말라 물을 마시듯이 그것을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상이기에 당연하게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그것들이 나의 ‘안전지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마음을 어렵게 하는 상황들,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에 대한 감정과 생각에 휩쓸려 퇴근하고 집에 돌아온 일상이 지켜지지 않을 때, 피아노 앞에 앉고 책상 앞에 앉는 거다. 그 시간에 집중하면 나를 마구 흔들었던 소용돌이에서 빠져나와 평온하고 안전한 일상을 살아내는 것 같다. 아니 그 평범한 일상을 누리고 있다.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지금의 시간을 부정적인 생각과 휩쓸리고 복잡한 소용돌이의 감정으로 채워서 보내고 있는지, 나의 생각과 마음을 정리하고 작은 성취를 맛보면서 다독이는 시간으로 보내고 있는지의 차이이다. 




나의 소중한 친구야, 오늘도 열심히 최선을 다해 하루를 보낸 나의 사랑스러운 친구야. 우리 안전지대를 만들자. 어렵지 않아, 네가 좋아하는 어떤 것이라도 좋아. 하늘의 구름 사진을 매일 찍어도 좋고, 좋아하는 음악을 하루에 하나씩 골라 들으며 노래 제목과 가사를 적어도 좋아. 인스턴트와 배달 음식 대신 직접 음식을 해 먹는 것도 좋고, 5분-10분이라도 밖에서 달리기를 해도 좋아. 너를 위한 무언가 한 가지를 하고, 그것에 대해 한 줄, 두 줄이라도 기록해. 꼭 글이 아니어도 좋아. SNS에 비밀계정을 만들어서 매일 사진으로 하나씩 쌓아도 좋아. 그 시간들이 너의 일상의 한 부분이 될 때 너의 ‘안전지대’가 되어 가쁜 숨을 고르고 편히 쉬어갈 수 있게, 저금해 놓은 성취감들이 너를 충전시켜 줄 거야. 오늘의 너를 위해 건네는 나의 다정한 진심에 꼭 ‘안전지대’를 찾는 것으로 대답해 주었으면 좋겠다. 



[오늘의 응원]

종이와 펜을 꺼내어 책상 앞에 앉는다. 좋아하는 것들을 하나씩 적어보자. 아주 사소한 것이어도 좋다. 종이를 가득 채우면 더더욱 좋다. 우유를 마시면 배가 아픈 나는 오트라테를 정말 좋아한다. 겨울에 깨끗하고 청명한 하늘을 좋아하고(가을 하늘과 다르다, 코 끝이 쨍하게 추운데 올려다보는 하늘과 선선한 공기에서 바라보는 하늘은 다르다!) 누군가와 마주 앉아 다정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좋아한다. 좋아하는 가수와 음악, 작가, 그림, 음식, 동물 무어든 괜찮다. 일단 좋아하는 것들을 늘어놓아 나만의 안전지대를 만들자. 그리고 그 안에서 하나씩 작은 성취를 만들어보자. 귀여운 고양이 사진 모으기도 좋고, 무너질 때마다 듣고 힘이 나는 나만의 플레이 리스트 만들기도 좋다. 나만의 안전지대는 나밖에 모르는 유일하고 특별한 곳이다. 내 손으로 잘 만들어서 하나씩 쌓아서 만나자. 그렇게 마주한 우리는 서로에게 다정한 미소로 서로를 응원할 수 있을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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