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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형산 Apr 16. 2024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잘 기른다

문장 9.       공손추 상 公孫丑 上 3.2


문장 9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잘 기른다


# 3.2


공손추가 물었다. 

“선생님께서 제 나라의 공경(公卿)과 재상(宰相)이 되셔서, 선생님의 도를 실행할 수 있게 되신다면, 선생님 덕에 제 나라 왕이 패자(霸者)가 되는 왕자(王者)가 되든지 하는 것이 당연하겠습니다. 이렇게 큰 자리에서 큰일을 하게 되시면, 마음이 동요되지 않으시겠습니까?”

맹자가 답했다. 

“아니다! 나는 사십 이후에 더는 마음이 동요되지 않았다.”

“그러시다면, 선생님께서는 맹분보다 훨씬 높은 경지에 다다르신 것입니다.”

“부동심은 크게 어렵지 않다. 고자(告子) 선생은 나보다 먼저 부동심을 얻었다.”

“부동심을 얻는데 특별한 방법이 있습니까?”

“있다. 북궁유라는 용사(勇士)는 용기를 기르는 데 있어, 칼이 피부를 갈라도 움츠러들지 않았고, 눈에 칼이 들어와도 물러서지 않았고, 털끝만큼이라도 남에게 좌절을 겪으면 마치 시장 한 복판에서 채찍질 당한 것으로 여겼다. 미천한 사람에게 모욕을 당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만승의 나라 군주에게도 똑같이 모욕을 당하지 않았다. 

맹시사라는 협객(俠客)은 용기를 기르는 데 있어, ‘이길 수 없어 보이는 적도 이길 수 있다고 믿고 싸운다. 다른 사람들처럼 적의 힘을 따져보고 난 후 진격하고, 승리할 수 있다 여겨질 때만 전투에 임하면, 대군(大軍)을 만나게 되면 두려움에 떨게 될 것이다. 나라고 어찌 반드시 승리하기만 하겠는가? 다만 두려워하지 않을 뿐이다’라고 했다. 맹시사는 그 용기를 기르는 방법이 증자와 비슷하고, 북궁유는 자하와 비슷하다. 이 두 사람의 용기는 누가 더 현명한지는 모르겠지만, 맹시사가 스스로 마음으로 약속하는 방법이 더 지키기 좋은 방법일 것이다. 

예전에 증자 선생이 제자인 자양에게 말하길, ‘그대는 용기를 좋아하는가? 내가 일찍이 공자 선생님에게 큰 용기에 대해 들었는데, 스스로 반성해서 정직하지 못하면, 비록 상대가 미천한 사람이라도, 내가 그를 두렵게 할 수 없을 것이고, 스스로 반성하여 정직하다면, 천만의 사람 앞에서라도 당당히 맞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하셨다. 증자 선생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용기의 방법이 맹시사의 기운을 지키는 방법보다 훌륭하다. 

“감히 여쭙습니다만, 선생님의 부동심과 고자의 부동심에 관해 들어볼 수 있을까요?”

“고자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만약 말로 동의를 얻을 수 없다면 내 마음까지 써가며 애쓸 필요가 없고, 만약 마음을 얻을 수 없다면, 내 몸의 기(氣)를 소진시켜며 애쓸 필요가 없다’고. 내가 보기엔 마음을 얻을 수 없다면 기를 소진시켜가며 애쓸 필요가 없다는 것은 맞지만, 말로 동의를 얻을 수 없다고 마음을 쓸 필요가 없다는 말은 틀렸다. 

무릇 뜻[志]은 기운(氣)의 장수이고, 기운은 우리 몸에 가득 찬 에너지 같은 것이다. 뜻이 먼저 방향을 잡으면 기운 또한 따른다. 그래서 ‘뜻을 굳게 하여야 하고, 기운을 난폭하게 사용하지 말아라’ 하는 것이다.”

“이미 말씀하시되, ‘뜻이 먼저 방향을 잡으면 기운 또한 따른다’고 하시고, 다시 ‘뜻을 굳게 하여야 하고, 기운을 난폭하게 사용하지 말아라’ 하시니 마치 기운이 뜻과는 별개로 움직이는 것처럼 말씀하신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뜻이 한결같으면 기운이 따라 움직이나, 기운이 앞서버려 뜻이 따라 움직이게 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지금 넘어지고 달리는 것이 기운의 작용이지만 이것으로 인해 그 마음이 불편해지면서 동요하게 되기도 한다.” 

“감히 여쭙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어느 점에서 뛰어나십니까?”

“나는 남의 말을 잘 알며, 나의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잘 기른다.”

“감히 호연지기가 어떤 것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 그 기운은 지극히 크고 지극히 단단하니, 정직함으로 잘 기르면서 해치지 않으면, 천지(天地) 간에 가득 차게 된다. 그 기운은, 의(義)와 도(道)에 배합되는 것이라, 의로운 길을 걷지 않으면 약해져버린다. 의(義)가 쌓여서 생기는 것이긴 하지만,  갑자기 한 번 의로운 행동을 했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마음에 부끄러운 일을 행하면 당연히 약해진다. 

내가 그래서 말하길 고자는 의(義)를 알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니, 그가 의를 마음 밖에 있는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반드시 호연지기를 배양해야하겠지만, 미리 이리저리 예단해서는 안 되며, 마음으로 호연지기를 기르겠다는 목적을 잊어서는 안 되지만, 조장(助長)하지도 말아야 한다. 송나라 사람 중에 벼가 자라지 않아 걱정하여 그것을 뽑아올려준 사람이 있었는데, 매우 피곤하여 돌아와서는 집안 사람에게 말하길 ‘오늘은 피곤하구나, 내가 벼가 자라는 것을 도와주었다.’하길래 아들이 바삐 달려가서 보았더니 벼가 그만 말라버리고 말았다. 천하에 벼를 조장하는 자가 적지 않다. 행하는 것에 이익이 없다고 호연지기를 기르지 않고 내버려두는 자는 밭에서 김매기를 하지 않는 자요, 그것을 조장하는 것은 벼를 뽑아올리는 자이다. 이같이 조장하는 일은 유익이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그것을 해치게 된다.”

“어떻게 해야 남의 말을 잘 알게 됩니까?”

“한쪽에 치우친 말로는 말하는 사람이 몰래 숨기려는 바를 알고, 지나친 말로는 그가 잘못에 빠져있는지를 알고, 삿된 말로는 그가 얼마나 바른 길을 벗어났는지를 알고, 회피하는 말로는 그가 어느 막다른 궁지에 몰려있는 지를 알 수 있다. 치우친 말, 지나친 말, 삿된 말, 회피하는 말, 이 네 가지는 마음에서 생겨나 반드시 정치에 해를 끼치게 되는데, 그것이 정치에 발현되면 나라의 여러 사업에도 해를 끼친다. 성인이 다시 오신다해도 반드시 내 말을 수긍하실 것이다.” 


(後略)


본문


공손추가 물었다. “선생님께서 제 나라의 공경(公卿)과 재상(宰相)이 되셔서, (선생님의) 도를 실행할 수 있게 되신다면, 이로 이해 (제 나라 왕이) 패자(霸者)가 되는 왕자(王者)가 되든지 하는 것이 이상할 것이 없겠습니다. 만약 이리 된다면, 마음이 동요되지 않으시겠습니까?”

公孫丑問曰: “夫子加齊之卿相, 得行道焉, 雖由此霸王不異矣. 如此, 則動心否乎?”

맹자가 말했다. “아니다! 나는 사십 이후에 더 이상 마음이 동요되지 않았다.”

孟子曰: “否! 我四十不動心.”

(공손추가) 말했다. “이와 같다면, 선생님께서는 맹분보다 멀리 나아가신 것입니다.”

曰: “若是, 則夫子過孟賁遠矣.”

(맹자가) 말했다. “이것은 어렵지 않다. 고자(告子)는 나보다 먼저 부동심을 얻었다.”

曰: “是不難, 告子先我不動心.”

(공손추가) 말했다. “부동심을 얻을 방법이 있습니까?”

曰: “不動心有道乎?”

(맹자가) 말했다. “있다. 북궁유는 용기를 기르는 데 있어, (칼이) 피부를 갈라도 움츠러들지 않았고, 눈에 칼이 들어와도 물러서지 않았고, 털끝만큼이라도 남에게 좌절을 겪으면 마치 시장 한 복판에서 채찍질 당한 것으로 여겼다; 미천한 사람[褐寬博, 거친 옷과 관을 두른 사람]에게 (모욕을) 당하지 않았고, 또한 만승의 나라 군주에게도 (모욕을) 당하지 않았다. 

曰: “有. 北宮黝之養勇也, 不膚橈, 不目逃, 思以一毫挫於人若撻之於市朝; 不受於褐寬博, 亦不受於萬乘之君, 視刺萬乘之君若刺褐夫; 無嚴諸侯, 惡聲至必反之. 

맹시사는 용기를 기르는 데 있어, 말하되 ‘이길 수 없어 보이는 적도 이길 수 있다고 믿고 싸운다. 적의 힘을 따져보고 난 후 진격하고, 승리할 수 있다 여겨진 후 회전(會戰)하면, 대군[三軍]을 만나게 되면 두려움에 떨게 될 것이다. 나[舍(맹시사의 사)]라고 어찌 반드시 승리하기만 하겠는가? 다만 두려워하지 않을 뿐이다’라고 했다. 맹시사는 (그 용기를 기르는 방법이) 증자와 비슷하고, 북궁유는 자하와 비슷하다. 이 두 사람의 용기는 누가 더 현명한지는 모르겠지만, 맹시사의 스스로 약속하는 방법이 더 지키기 좋은 방법일 것이다. 

孟施舍之所養勇也, 曰: ‘視不勝猶勝也. 量敵而後進, 慮勝而後會, 是畏三軍者也, 舍豈能爲必勝哉? 能無懼而已矣.’ 孟施舍似曾子, 北宮黝似子夏. 夫二子之勇, 未知其孰賢, 然而孟施舍守約也.

예전에 증자가 자양에게 말하길, ‘그대는 용기를 좋아하는가? 내가 일찍이 선생님(공자)에게 큰 용기에 대해 들었는데, 스스로 반성해서 정직[縮(축), 곧다는 뜻에서 정직으로 해석할 수 있다]하지 못하면, 비록 (상대가) 미천한 사람이라도 내가 그를 두렵게 할 수 없을 것이고, 스스로 반성하여 정직하다면 천만의 사람 앞에서라도 나는 (당당히) 맞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하셨다. 맹시사의 기운을 지키는 방법은, 증자의 스스로 약속하는 방법보다 못하다. 

昔者曾子謂子襄曰: ‘子好勇乎? 吾嘗聞大勇於夫子矣: 自反而不縮, 雖褐寬博吾不惴焉; 自反而縮, 雖千萬人吾往矣.’ 孟施舍之守氣, 又不如曾子之守約也.”1

(공손추가) 말했다. “감히 여쭙습니다만, 선생님의 부동심과 고자의 부동심에 관해 들어볼 수 있을까요?”

曰: “敢問夫子之不動心與告子之不動心, 可得聞與?”

“고자가 말했다. ‘만약 말에서 얻을 수 없다면 마음의 도움을 구할 필요가 없고, 만약 마음을 얻을 수 없다면, 기(氣)의 도움을 구할 필요가 없다’고. 마음을 얻을 수 없다면 기의 도움을 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가능하지만, 말에서 얻을 수 없다고 마음의 도움을 구할 필요가 없다는 말은 가능하지 않다. 

“告子曰: ‘不得於言勿求於心, 不得於心勿求於氣.’ 不得於心勿求於氣, 可; 不得於言勿求於心, 不可. 

무릇 지(志)는 기(氣)의 장수이고, 기는 우리 몸에 가득 찬 (힘 같은) 것이다. 지(志)가 먼저 다다르면 기(氣) 또한 따른다. 그래서 ‘지(志)를 굳게 하여야 하고, 기(氣)를 난폭하게 사용하지 말아라’ 하는 것이다.”

夫志, 氣之帥也; 氣, 體之充也. 夫志至焉, 氣次焉, 故曰, 持其志, 無暴其氣.”

“이미 말씀하시되, ‘지(志)가 다다르면 기(氣) 또한 따른다’고 하시고, 다시 ‘지(志)를 굳게 하여야 하고, 기(氣)를 난폭하게 사용하지 말아라’ 하신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旣曰, ‘志至焉, 氣次焉’, 又曰 ‘持其志, 無暴其氣’者, 何也?”

(맹자가) 말했다. “지(志)가 한결같으면 기가 (따라) 움직이나, 기(氣)가 한결같아 지(志)를 따라 움직이게 하는 경우도 있다. 지금 넘어지고 달리는 것이 기(氣)의 작용이지만 이것으로 인해 그 마음이 동요하게 되기도 한다.” 

曰: “志壹則動氣, 氣壹則動志也. 今夫蹶者, 趨者, 是氣也而反動其心.”

“감히 여쭙건대, 선생님께서는 어느 점에서(惡乎) 뛰어나십니까?”

“敢問夫子惡乎長?”

(맹자가) 말했다. “나는 남의 말을 잘 알며, 나의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잘 기른다.”

曰: “我知言, 我善養吾浩然之氣.”2

“감히 호연지기가 어떤 것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敢問何謂浩然之氣?”

(맹자가) 말했다. “말로 하기 어렵다. 그 기(氣)는 지극히 크고 지극히 단단하니, 정직함으로 잘 기르고 해치지 않으면, 천지(天地) 간에 가득 차게 된다. 그 기라는 것은, 의(義)와 도(道)에 배합되니, 이것(의와 도)이 없으면 시들어버린다. 그것은 의(義)가 쌓여서 생기는 것으로, 갑자기 의로운 행동을 했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마음에 부끄러운 일을 행하면 시들어버린다. 

曰: “難言也. 其爲氣也, 至大至剛, 以直養而無害, 則塞於天地之間. 其爲氣也, 配義與道, 無是, 餒也. 是集義所生者, 非義襲而取之也, 行有不慊於心, 則餒矣. 

내가 그래서 말하길 고자는 의(義)를 알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니, (그가 의를 마음) 밖에 있는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반드시 호연지기를 배양해야하겠지만, 미리 예정(正)해서는 안 되며, 마음으로 (그 목적을) 잊어서는 안 되지만, 조장(助長)하지도 말아야 한다. 송나라 사람 중에 벼가 자라지 않아 걱정(閔)하여 그것을 뽑아올려준(揠(알)) 사람이 있었는데, 매우 피곤하여 돌아와서는 집안 사람에게 말하길 ‘오늘은 피곤하구나(病), 내가 벼가 자라는 것을 도와주었다.’ 하니 아들이 바삐 달려가서 보았더니 벼가 그만 말라버리고 말았다. 천하에 벼를 조장하는 자가 적지 않다. 행하는 것에 이익이 없다고 내버려두는 자는 밭에서 김매기를 하지 않는 자요, 그것을 조장하는 것은 벼를 뽑아올리는 자이다. 이같이 조장하는 일은 유익이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그것을 해치게 된다.”

我故曰告子未嘗知義, 以其外之也. 必有事焉而勿正, 心勿忘, 勿助長也, 無若宋人然. 宋人有閔其苗之不長而揠之者, 芒芒然歸, 謂其人曰: ‘今日病矣, 予助苗長矣.’ 其子趨而往視之, 苗則槁矣. 天下之不助苗長者寡矣, 以爲無益而舍之者, 不耘苗者也; 助之長者, 揠苗者也. 非徒無益, 而又害之.”

“어떻게 해야 남의 말을 잘 알게 됩니까?”

“何謂知言?”

(맹자가) 말했다. “치우친(詖) 말로는 그 가려진 바를 알고, 지나친 말로는 그 빠져있는 것을 알고, 삿된 말로는 그 벗어난 바를 알고, 회피하는 말로는 그 궁지에 빠진 바를 알 수 있다. (이 네 가지는) 마음에서 생겨나 반드시 정치에 해를 끼치게 되는데, 그것이 정치에 발현되면 (나라의) 여러 사업에도 해를 끼친다. 성인이 다시 오신다해도 반드시 내 말을 수긍[從]하실 것이다.” 

曰: “詖辭知其所蔽, 淫辭知其所陷, 邪辭知其所離, 遁辭知其所窮. 生於其心, 害於其政, 發於其政, 害於其事. 聖人復起, 必從吾言矣.”


(後略)



1. 부동심(不動心)


이 문장의 첫 번째 주제는 부동심이다. 제자 공손추가 맹자에게 경상(卿相)의 자리에 오르면 그 자리의 무게 때문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겠냐고 묻는다. 그러자 맹자는 자신은 마흔 이후에 부동심을 얻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용기를 얻은 사람들의 여러 사례가 나온다. 협객(俠客)으로 보이는 맹분, 맹시사의 사례가 한 축을 이루고, 증자의 사례가 그에 대응하여 나온다. 맹분과 맹시사의 용기는 도덕과는 덜 긴밀한 자존감의 발현으로 보이는데 반해, 증자의 용기는 도덕적 자기 성찰과 연결된다. 반성해서 스스로 정직한 사람은 천군만마를 맞닿뜨리더라도 능히 맞설 수 있다고 하기 때문이다. 증자가 공자 말년의 제자이고 맹자의 학문도 그 흐름 아래 있기에 이런 관점은 당연한 것이다. 결국 맹자의 부동심은 단순한 자존감의 크기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인의(仁義)를 지켜나가는 당당함에서 오는 것이다. 유가(儒家)에서 인정하는 부동심이란 정직한 삶, 인의(仁義)의 삶에서 비롯한다. 


2. 호연지기(浩然之氣)


호연(浩然)이란 넓고 큰 모양, 물이 그침 없이 흐르는 모양 등을 의미한다. 호연의 기운이란 거침 없이 크고 가득한 기운이라고 직역할 수 있다. 맹자는 유가(儒家)의 논리에 입각해 호연지기를 의(義)와 관련시킨다. 앞서 부동심도 정직에서 비롯했듯이, 정직하게 의를 지켜나가고 의(義)의 도(道)에서 배합된 실천을 해나갈 때 호연지기가 길러진다고 본다. 한 두 번의 정의로운 행동으로 배양되는 것이 아니고, 억지로 조장(助長)한다고 길러지는 것도 아니다. (‘조장’이라는 말이 바로 이 맹자에서 나왔다.)

맹자 자신이 호연지기를 잘 기른다고 했는데, 이는 이 책 ≪맹자≫를 통해서도 여실히 확인된다. 그는 왕들 앞에서 조금도 굽힘이 없었고, 언제나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그리고 ≪맹자≫를 읽고 맹자를 존경하는 동아시아의 지식인들도 자연히 호연지기 기르기를 힘쓰며 살아왔다. 조선조 이래 임금을 비롯한 권력의 정점에 있는 사람들에게 직언(直言)을 마다치 않았던 많은 이들이 지닌 것이 호연지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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