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겨운 숨을 쉬었다
엄마는 제 삶이 불행하다며 울었다.
그 사건이 발생하고나서, 엄마는 한동안 울었다. 때때로 술잔을 기울이는 날이 오면, 기억을 머금은 눈물을 한 방울씩 훔치며 말했다. 제 삶이 불행하다는 말을 뱉어냈다.
우리 가족은 대체로 유머러스하고, 장난치기를 좋아한다. 가끔씩 목소리가 커지긴 하지만 다 같이 모여 술잔을 부딪힐 때면, 우울했던 적은 좀처럼 없었다. 그렇지만 엄마는, 한동안 그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 엄마가 울때면 기억을 머금은 눈물이 끈적한 송진이 되었다.
나는 엄마가 그렇게 변하게된 연유를 안다. 엄마를 그렇게 변하게 만들었던 사건을 같이 겪었으니까. 그 불행의 기원은 알게 되었지만, 엄마의 눈에서 흐르는 송진이 얼마나 짙은지 그 깊이는 알지 못한다.
이모는 조카들 중에서 특히나 나와 내 친누이를 좋아했다. 타지생활을 하게 된 내게, 발령지에 살고 있던 이모는 큰 힘이 되어 주었다. 밥을 사주었고, 반찬통에 김치를 챙겨주었다. 먼저 전화를 걸어 안부인사를 물어 주었다. 무엇보다 이모가 나에 대한 넘치는 애정을 가지고 있다라는 사실 자체가 내게 힘을 주었다. 이모의 목소리는 언제나 생기가 넘치고 특유의 애교가 담겨있었다. 하루는 이모의 집에서 저녁식사를 하러 갔는데, 자고 내일 아침에 바로 출근 하라고 할 정도로, 나와 같이 시간을 보내길 좋아했더랬다. 그치만 나는 용돈이나 받을 줄 아는 철부지였다. 그래도 이모는 항상 나를 보면 밝은 목소리로 웃었다.
엄마는 아들 셋과 딸 넷인 집안에서, 오빠 셋을 제외한 나머지 자매들 중 맏언니였다. 나와 누이를 가장 좋아해줬던 이모는 자매 중 엄마 다음의 둘째로, 엄마가 가장 진한 마음을 나눈 형제였다. 이모의 우리를 향한 애정이 그 증거였다. 덕분에 나와 누나도 둘째이모가 가장 편했고 가장 좋았다.
내가 그 도시에서 근무를 한 건 총 3년이었다. 그리고 내가 이모를 내 발로 찾아간건 두 번이었다. 저녁식사를 함께 한 뒤 이모의 집에서 자고 다음날 아침에 출근했던 날이 바로 첫 번째, 그리고 그 다음이 두번째였다. 두 번째 만남에서 나는 이모가 항상 보여주었던 밝은 목소리와 웃음을 볼 수 없었다.
'이모가 쓰러졌다. 얼른 OO병원으로 와라'
어느날, 엄마는 수화기 너머로 말했다. 겨우 이 한 문장은 엄마의 굵은 울음으로 알아듣기 힘들었지만, 이모가 쓰러졌다는 소리만은 이상하게 또렷히 들렸다. 아빠는 정확한 병원의 위치를 대신 알려주었다. 두 번째로 만난 이모는 병원 응급실에 누워 있었다.
꺽꺽거리며 숨을 쉬었다. 산소호흡기를 찬 상태로 지독한 숨을 쉬었다. 마치 가래가 들끓는 듯한 소리에 가까웠다. 꽉 막힌 그 숨소리가 불규칙한 파동으로 흔들릴 때마다 이모의 몸이 흔들렸다. 눈은 초점을 잃은채 깜빡거리지도 않고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숨만 쉬었다. 그 힘겨운 숨을. 나는 불과 얼마전에 이모와 식사를 했는데, 내가 보고왔던 이모의 마지막 모습과 목소리는 생기가 넘쳤는데, 다시 마주친 모습은 너무나 다른 모습이었다.
현실은 그 실체를 즉시 보여주지 않는다. 어떤 변화가 갑작스러울수록, 그리고 그 변화의 폭이 깊을수록 변화된 현실이라는 실체는 형상화 되길 거부한다. 나는 이 광경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모가 침대에서 꼼짝 못하고 발작하듯 숨만 쉬는것처럼, 나는 그 병상 앞에서 팔다리가 굳어가고 눈동자만 발작하듯 굴렀다.
이모의 심정지는 이른 아침 찾아왔다. 이모부가 막 출근을 나가고 난 직후였다. 워낙 독서를 좋아했던 이모는 그날밤도 독서삼매경에 빠져, 밤을 새워 책을 읽었다고 한다. 책을 읽다가 날이 밝았을 것이고, 남편을 배웅했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는 귀여운 딸이 학교에 가기 전에, 아침밥을 차려주었다. 분주히 움직이고 있던 그 순간에 심정지는 불현듯 찾아왔다. 심정지의 전조증상을 느낀 이모는 119에 직접 전화를 했다. 아마 처절한 발버둥이었을 두 번의 전화를 거쳐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깨어나지 못한 이모의 심정지 직전 상황을 알 수 있었던 것은, 이 모든 것이 겨우 초등학생이었던 내 사촌동생 앞에서 발생한 사건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모의 심장은 응급처치 후 다시 뛰기 시작하기까지 15분이 걸렸다. 이 짧은 시간은 한 사람의 몸을 붕괴시키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는 이른 아침에, 귀여운 딸 앞에서 찾아왔다. 남편이 나간 직후였다. 병원 응급실은 집에서 10분 거리였다.
15분은 한 사람을 붕괴시키기에 충분했는데, 10분 떨어져있는 병원에서 구급차가 오기엔 충분하지 못했다.
골든 타임을 놓쳤다. 깨어날 희망이 깨어나지 못할 가능성 보다 높은 시기가 지났다. 끝을 알 수 없는 기다림의 국면인 '연명치료'라는 것이 시작했다. 하염없이 기다리는게 전부인, 그러나 환자가 깨어날 가능성을 높일수는 없는 이 마지막 방법을 두고 그들은 연명‘치료’라고 불렀다. '치료'라는 단어의 무용함을 생각했다.
이제 이모는 응급환자가 아니었고, 응급실에서 나와 일반 병실에 눕게되었다. 간병인, 간호사들이 이모를 돌봐주었다. 타인의 손이 땀을 닦고 머리를 자르고 흐르는 침을 닦았다. 때때로 눈을 끔뻑 거렸고 발작과 같은 거친 숨을 지속했다. 혼자 가래를 뱉지 못해서 컥컥 비명을 질렀다.
초점은 없을지언정 이전의 그 순수하고 맑은 눈을 가졌던 이모의 눈동자는 여전했다. 나는 이모와 눈을 마주쳤는데, 이모는 나를 볼 수 없었다. 그 눈과 몸은 나를 보지만, 정신은 나를 보지 않았다. 몸이라는 것도 나를 보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모의 몸은 컥컥거리는 소리와 함께 조금씩 움찔거렸다. 그 동물적인 움직임이, 살아있지 않은 몸부림을 부여했다. 콱 막힌 숨, 아직은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증거인 그 숨이 고통의 몸부림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모는 컥컥 하고 숨을 쉬었다. 숨만 쉬었다.
나는 그런 이모의 팔다리에 로션을 바르며 몇 분 동안 차가운 팔다리를 주물렀다. 끔뻑이는 눈을 보고 '얼른 일어나야지' 하고 말했다. 간호사를 불러 가래를 빼달라고 했다. 간병인에게 우리 이모 좀 잘 부탁한다고 말했다. 입술에 묻은 이물질을 닦았다. 손을 잡았다. '이모 조카 와서 힘나지?' 하고 물었다. 대답을 기다리다가 병실을 나왔다.
함께 병원에 방문했던 셋째 이모는 기초생활수급자였다. 취업을 위해 공부를 하고 있던 셋째 이모는 공부를 제쳐두고 매일 밤마다 병원에 방문했다. 내가 했던 것들을 매일 반복했다. 무거운 몸과 마음의 짐을 동여매고 병원에 와서는 노동을 했다. 그것은 감정과 육체를 동시에 갉아먹는 일이었다. 병원이라는 장소는 그런 곳이었다. 멀쩡한 사람도 조금씩 닳아 없어지는 곳.
그런 그녀의 지갑에 화폐 구실을 할 수 있는 것은 교통카드 하나였다. 그럼에도 매일같이 병원에 왔다. 체력과 감정이 바닥날 때 즈음, 셋째 이모는 우리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배가 고프고 힘이 없다고 했다. 가족을 사랑하는 일도 돈이 필요했다. 엄마는 내게 대신 돈봉투를 전해주라고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엄마가 전해주라던 그 봉투에, 몇 푼을 더 욱여넣는 것 뿐이었다.
시간이 얼마 지나고, 셋째 이모마저도 앓아 누웠다. 둘째이모완 달리 마음의 병원에 입원했다.
엄마는 그때부터 제 삶이 불행하다며 울었다. 이따금 소주를 마실 때면 그런 소리를 했다. 첫째 딸인 엄마가 두 명의 동생이 불행한 삶을 산다며 자책하면서 울었다. 죄 없는 죄책감을 흘렸다.
시간이 쌓여 세월이 흐르고, 연명치료는 중단 되었다. 귀여운 이모의 딸은 고등학생이 되었다. 엄마는 더이상 그 죄책감과 불행을 입에 담지 않게 되었다. 이모부도 이제는 전처럼 환한 웃음은 아니지만은 얕은 미소를 띤 얼굴로 나와 누이를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셋째 이모와도 맑은 정신으로 대화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아주 가끔, 그때의 숨소리를 떠올린다. 이모의 숨소리는 타닥타닥 타들어가는 장작을 닮았다. 그리고 또한 땅바닥에 불꽃을 퉁기고 고꾸라진, 꺼져가는 담배꽁초와 닮았다. 불타는 장작의 둔탁한 파열음과 쓸쓸한 담배꽁초의 바스라짐을 떠올린다. 이모는 그렇게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