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의 도주
22년 4월 1일 사천공항 상공에서 두 항공기가 충돌했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나는 이 사건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를 찾지 못한다.
언어는 그날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지금도 그 사건을 떠올리면 내 사고는 진공상태에 이른다.
하늘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파랬다.
‘아… 내 짬에 벌써 지휘관이라니,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이야?’
22년 초, 나는 사천비행단이라는 공군 부대의 한 ‘지휘관’이 되어버렸다. 사실 지휘관이란 것은 군에선 경력을 쌓고 계급이 올라가면 자연스럽게 모두가 해야 하는 직책이다. 하지만 나는 너무 일찍 그 자리에 앉았다. 자리가 나를 기다려주진 않았고, 오히려 나를 끌어당겼다. 당시 그 직책의 편제상 적정계급은 소령으로, 내 경력에 비해서는 4~5년은 더 지난 뒤에나 가능한 일이었다. 한 기업의 대리가 과장이나 부장급의 책임을 맡게 된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그만큼 나는 경험도 자격도 부족한 ‘초짜’였다. 이를 반증하기라도 하듯, 나는 대위면 의무적으로 거쳐야 하는 ‘초급 지휘관 참모과정’도 아직 수료하기 전이었다. 하지만 직책은 나를 기다려 주지 않았다. 때문에 일단은 보임을 한 뒤, 짧은 적응기간을 거친 뒤 교육과정에 들어가게 되었다.
교육기간은 총 3개월이 소요되어 내 공백기 동안 나보다 더 새파란 중대장에게 지휘관직을 임시로 맡겨두어야 했다. 지금 교육에 입과 하던 조금뒤에 입과 하던 조삼모사 꼴이었기에, 불가역적인 걱정을 안고 나는 부대를 잠시 떠났다.
3개월간의 교육을 시작하기에 앞서, 교육생들은 또 다른 기관에서 1주짜리 ‘리더십 교육'을 받아야 했다. 본교육에 비하면 가벼운 내용이기도 했고 오랜만에 동기들을 만나 잠시 회상에 잠겨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리고 4월 1일 금요일, 1주의 리더십 교육을 마치고 수료식을 위해 교육생들은 모두 대강당에 모였다.
그러다 어느 순간 한쪽구석에 사람들이 몰리면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점점 커지는 소음에 나 또한 눈과 귀가 그곳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무슨 일인지 의문이 생기기 시작할 무렵 ‘항공기’와 ‘사고’라는 단어가 흘러나왔다. 갑자기 강당의 공기가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공군기가 사고가 났나? 그리곤 내 손바닥이 흔들렸다. 휴대폰 화면에는 강렬한 단어들이 떠올랐다. 공기가 멈춘듯 했다.
'사천기지 KT-1 사고발생, 비상탈출 확인 중'
순간, 내 머릿속엔 '어떻게 해야 하지?'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일 수도 있으나 '복귀'라는 단어를 바로 용기 있게 떠올리지 못한 결과였다. '당장 복귀해야겠다'라고 생각하지 못한 나의 부도덕을 책망한다.
그렇지만 나는 결론적으론 복귀를 선택했다. 내 행동은 응당 해야만 하는 책무를 다하는 모습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아무도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내 속마음이라는 뒷골목에서 혐오스러운 계산을 했다. 그것도 수도 없이, 또한 수 차례에 걸쳐서, 단계적으로.
내가 보임했던 대대는 '관제'대대, 그러니까 나의 직능은 이 사천공항의 관제 업무 일체에 대한 관리감독이었다. 항공기를 운항하는 것은 조종사지만 그 항공기의 길을 지상에서 통제하는 것은 바로 이 '관제'의 영역이다. 따라서 항공기 사고가 나게 되면, 직접적인 '원인'제공은 하지 않았더라도 그 사고와 '영향'이 없다고 단언하기가 매우 어려운 분야이다.
'우리 대대는 크게 관련 없을지도 몰라, 항공기 기체 결함일 수도 있잖아'
내 마음속에 있는 악마의 속삭임과 함께 내 첫 도주가 시작되었다. 우리의 직능, 책임범위 밖의 일일수도 있다고 희망회로를 굴리며 말이다. 내심 그러길 바랐던 것이다. 사고의 소식이 처음 전파되었을 때, '공중 충돌'이 아니라, '사고 발생'이었다. 사고의 구체적인 경위나 종류가 알려지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나는 이런 희망이 담긴 상상을 할 수 있었다. '제발 우리 쪽엔 관련이 없기를' 마치 기도라도 하듯 나는 속으로 계속해서 되뇌었다. 이 문장이 사실은 '내가 갈 필요 없기를'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은 내 한 통의 전화도 그들을 더 혼란스럽게 할 수 있을 거야'
지금 사천기지 전체는, 우리 대대는 사건의 전말을 파악하기도 벅찬 상태일 것이 분명했다. 어수선하고 전화는 불통일 것이다. 중대장 시절에도 항공기 추락사고를 겪어 보았기에, 멀리서 걸려오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전화통화 하나가, 그리고 그로 인한 다그침이 얼마나 큰 짐으로 작용하는지 알고 있었다. 내 한 통의 전화도 사고의 소용돌이 속에서 발버둥 치는 그들에겐 거센 바람이 될 것이 분명했다.
이런 나의 예상 혹은 핑계를 기반으로, 나는 우회경로를 찾았다. 기지에 있는 동료들이 아닌 다른 소식통을 찾은 것이다. 이에 대한 결과로, 나는 평소 존경하고 많은 의지를 해오던 선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침 그 선배의 직책이 중앙에서 한국의 전반적인 공중상황을 모니터링할 수 있는 보직이기도 했다.
'공중충돌 사건이다. 너희가 빠질 수 없겠어'
아직 파악되지 않은 것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그 선배와의 통화로 이번 사고가 '공중충돌'이라는 것만은 확인할 수 있었다. 여기서 나의 첫 번째 시나리오가 깨졌다. 수료식을 끝마치고, 나는 교육과정이 열리는 대전이 아니라 다시 사천으로 운전대를 돌렸다. 그때서야 나는 사천기지로 전화를 걸었다.
'지금 내려갑니다, 현재까지 파악된 사항 전부 말씀해 주세요'
미심쩍은 내 통화의 순서는 아직도 나를 갉아먹는다. 정말로 내 연락을 받았으면 사천기지 요원들이 부담을 느꼈을까? 내가 선배에게 전화를 걸었던 그 타이밍에, 선배가 아니라 내 업무대리를 하고 있던 중대장 후배에게 전화를 걸었다면? 그 후배는 당장의 정신없는 상황에서 내 연락도 부산스러움을 더하는 업무처럼 느껴졌을까? 아니 오히려 안도감이 들었을 수도 있지 않은가? 내가 선배와 통화를 하고, 사천으로 복귀할 결심을 하고, 차량을 돌리기까지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다. 나는 이 일련의 고민이 흘러간 시간대에서 '시간'을 느낄 수 없었으니까 말이다.
선배에게 먼저 연락하는 게 옳았을까? 사실은 사천기지 내 동료들로부터 나를 필요로 한다는 말을 듣기가 겁났던 것이다. 이것이 내 첫 번째 회한이요 첫 번째 자기혐오이다. 그리고 이것이 '첫 번째'인 것 또한,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는 까닭이다. 나는 두 번째 도주를 궁리했다.
사천공항에, 내 사무실에 도착했다. 이곳의 분위기가 사뭇 달랐던 것은 채 정문을 지나기도 전에 느낄 수 있었다. 내 업무대리를 하던 중대장에게, 대대원들에게 나의 복귀를 알렸다. 그들은 어떤 알듯 모를듯한 안도를 보였다. 나는 앞으로 어떤 일이 닥칠지 알 수 없는 미지의 불안함을 헤쳐나가야 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 부대에, 우리 대대에 닥쳐올 '불안'을 내가 최전선에서 막아내야 했다. 그들이 그 묘한 안도감을 가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나에겐 정 반대의 감정을 가지게 했다.
나는 그게 싫었다. 애초에 내가 이 정도의 경력을 가지고 지휘관이 되어야 한다는 것부터가, 정확히 이런 느낌이었다. 책임져야 할 것들의 스펙트럼이 내 능력의 너비보다 큰 것이었다. 이는 이 직책의 시작부터 불만과 절망의 단초를 제공하는 근간으로 충분했다. 난 무서운데, 그들은 나에게 의지했다. 그렇지만, '멀쩡해 보이도록' 설 줄 알아야 했다. 내 능력의 한계를 보여선 안 됐고, 내 능력에 한계가 있어서도 안 됐다.
그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내 두 번째 도주가 시작되었던 것은.
충돌사고가 난 것은 4. 1. 금요일이었다. 주말이 지나면 본 교육이 시작될 터였다. 곧바로 사고진상조사가 시작되었다. 조사단에서 필요한 자료를 수집, 정리하여 제공하는 것은 사실 주말이면 충분했다.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될 때마다 자료를 추가로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자료를 먼저 수집한 뒤 조사를 하는 프로세스였기 때문이었다. 중대장 시절에 항공기 추락사고를 겪었던 경험이 그래도 앞으로 사고조사가 어떻게 흘러갈지에 대한 지식은 제공해 주었다.
'주말까지 사고조사를 위한 일체의 업무는 완료하고 갈 수 있습니다.'
직속상관에게 주말 동안 모든 지원업무를 끝낼 수 있다고 말했다. 허가하신다면 교육을 다시 입과 해도 되겠냐는 의미였다. 부담을 느끼신다면 교육을 전면 취소하고 기지에 남겠다고 뒤늦게 덧붙였다. 직속상관께 판단을 떠넘겼다. 어린아이가 제 눈을 가린 채 숨바꼭질하듯 교육에 다시 가고 싶은 마음을 숨겼다.
“그래도… 남아주게. 부탁이야.”
상관은 내게 기지에 남아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 말이 명령보다 무거웠다. 그의 답변이 화살촉이 되어 가슴에 박혔다. 그 뒤늦은 죄책감과 앞으로 에 대한 파리한 긴장감, 그리고 대대원들을 마주하여야 한다는 부끄러움이 복합적으로 나를 괴롭혔다. 그렇게 나는 결국 기지에 남았다. 책임이 아닌 체념, 그게 바로 내 두 번째 도주였다.
'그래도 대장님이 복귀해 주셔서 얼마나 든든한지 모릅니다.'
대대원들은 나를 반겼고, 나는 내 두 번의 도주를 숨겼다.
그날 밤, 나는 불 꺼진 사무실에 남았다. 모니터 불빛 아래서 숨을 골랐다. 몇 번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하얀 종이엔 딱딱한 글자가 담겼다. 이 사건의 사실관계는 가만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비릿한 쇳내가 나는 듯 했다. 여러 단어를 썻다 지우기를 반복했다. 키보드 소리, 시계바늘 소리가 사무실을 채웠다. 내 호흡이 점점 바닥부터 쌓여가듯이, 텅 빈 사무실이 허연 무언가로 채워져갔다. 나는 내일을 떠올렸다. 내일도 하늘은 파랗게 열릴 것이었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