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나절의 울음을 보내고 나서야
네가 떠났을 때, 세상은 질병이 창궐했던 시기였다. 무언가를 탓하고 싶진 않지만, 코로나 사태는 우리 삶의 많은 양상을 바꿔 놓았다. 이 질병은 우리 모두의 발을 묶었다. 하지만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이때의 내 결정과 판단에 대해서 의문을 갖는다. 그리고 내 판단의 결과물이 무엇이었는가를 떠나서, 네가 쓰러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내가 가장 먼저 고려해야 했던 것은 이 질병이었다. 내가 너의 마지막을 함께하는 것에 대하여, 어떤 걸림돌이 있었다는 것이다. 응당 세상은 내게, 아니 너에게 그래선 안 됐다. 나는 너의 생이 위태로울 때, 너에게 달려가기를 주저했다.
처음 네가 쓰러졌다는 소식이 들려온 것은 일요일이었다. 그리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출근을 해야 하는 월요일은 몇 번의 눈 깜빡임이 지나면 돌아올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술을 들이켰다. 이 일요일이 지나면, 네가 다시 목소리를 들려줄 수 있는 주말은 없다는 것을 나는 본능적으로 알았으니까. 그리고 나는 또 다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진실을 목도하기엔 나는 비겁했다.
네가 너 스스로의 죽음에 대해 어떤 슬픔이나 억울함을 호소할 기회도 없이 목소리를 잃었을 때, 나 또한 목소리를 잃었다. 그러니까 네가 우리에게 안녕이라는 말 한마디 없이 우릴 떠나갔을 때. 나는 이 한마디를 하지 못했다.
'친구가 죽었습니다. 장례식에 다녀오겠습니다.'
코로나가 창궐했던 그때, 우린 모두 착란이 있었던 걸까? 아니라면 나는 혼자서 큰 착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을까? 그때 당시의 나는 너의 소식을 알린다 한들, 이 조직은 네가 있는 먼 지역까지 나를 보내줄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나의 이 개인적인 상황을 이해해 주기엔 이 조직 혹은 내 상관은 경직되어 있다고 느꼈다. 내가 무슨 말을 한들, 결과는 정해져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너의 장례식에 갈 수 있는 결정의 주체가 내 속한 조직이던, 내 상관이던, 혹은 나 자신이던 중요치 않았다. 그 주체가 누구든, 나는 너에게 갈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사실 나는 그저 남의 눈치나 살폈던 걸치도 모른다. 내가 이렇게 눈치를 보고 있던 시점에서 이미 결론은 나있었다.
나는 지레 포기했던 것이다.
지레 포기한 나 자신을, 나는 평생 잊을 없다. 나는 그렇게 허무하게 너의 마지막을 놓쳤다. 나는 수도 없이 생각했다. 내가 너의 마지막을 함께하지 못한 것에 대한 핑계를 생각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내가 수없이 생각을 해야만 했던 이유는, 그 핑계 혹은 이유라는 게 없기 때문이었다.
나는 가끔 삶의 무용함에 대하여 떠올린다. 그리고 그 무용함을 쓰다듬는다. 그렇지만 나는 너를 떠올릴 때면 내가 떠올리는 것이 '무용'이라는 것을 망각한다.
내가 너를 드디어 마주할 수 있었던 것은 '삼우제'였다. 장례식이랑 며칠 차이도 나지 않았는데, 나는 이때를 택했다. 장례식은 못 가면서, 고작 며칠 지나고 나서야 너를 찾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게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때 당시에는 내게 이건 최선이었다.
혐오스러운 마스크를 썼다. 그 덕에 내 부끄러움을 감출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가족들 마저 저 멀리 떨어져 바라보는 그 작은 공간에서, 너의 사진을 마주 본 채로 나는 고개를 조아렸다. 어머님은 눈물을 흘렸다. 나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이자리에라도 찾아온 나를 너무나도 고맙다고 하셨다. 겨우 이 자리에 마주 선 내가 거북했다. 네 동생이 계속 내 옆을 지켰다.
사실 내가 너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던 것은, 이때의 너를 본 것이 처음이서 일지도 모른다.
갑작스럽게 떠나는 바람에 마지막 인사는 당연히 건네지 못했다. 너와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는 참 하찮은 것이었다. 네가 네 삶의 의지와는 달리 눈을 감아야 했던 순간부터, 하늘나라로 가는 순간까지 함께 해준 것이 없었다. 네 상실을 기리는 장례식마저도 나는 참석하지 못했다.
나는 내가 너의 곁에 있어주지 못한 것들을 떠올릴 때면, 너의 정성이 생각난다. 너는 내 삶의 중요했던 순간들에 꼭 함께 해주었다. 내 할아버지가 생을 마감하셨을 때, 너는 그 새벽에 3시간이 넘는 거리를 택시를 타고 달려왔다. 내 졸업식 때도 넌 함께해 주었다. 다른 많은 내 가족들이나 친구들이 어색해도, 개의치 않고 너는 또 자리를 지켜주었다. 그런 네 은혜와는 달리 나는 네가 가는 길 옆에서 눈물 한 방울 흘려주지 못했다. 쓸데없이 너는 의리가 강했다. 나는 그것을 네가 사라지고 나서야 알게 된 것이다.
납골당에서 나는 한참을 네 흔적이 담긴 자그마한 공간 속을 응시했다. 어머님이 고르고 고른 사진들이 그 작은 공간을 가득 채웠다. 하나하나의 너는, 너의 삶이 그랬던 것처럼 새들의 지저귐 같은 상쾌한 웃음으로 그 작은 공간을 채웠다.
작은 언덕 위에 위치하고있던 납골당은 여느 절의 분위기가 그러하듯 조용한 향기를 뿜었다. 날씨가 미묘하게 흐릿했다. 그게 납골당 속의 조용함에 어떤 기운을 불어다 넣어주듯, 바깥의 공기는 서늘했다. 사실은 절 밖의 공기는 중요치 않았다.
네 눈높이, 그러니까 네가 자리 잡은 그 한 칸은, 흐느끼는 어른을 보듬어주는 어린아이 키만한 높이여서 그 아이의 고사리손이 내게 닿을 법한 높이였다. 나는 땅바닥에 주저앉았고, 힘없는 고개를 축 늘어놓으니 네 사진이 보였다. 너는 가만 웃었고, 나는 그 조용한 웃음 위에서 끅끅 거리며 울었다. 네 동생이 오히려 웃는 얼굴로 나를 다독여주었다. 그 위로가 나에겐 짐이 되었다. 죄책감의 증폭이었다.
반나절의 울음을 보내고 나서야 나는 다음을 기약하며 네 곁을 떠날 수 있었다. 처음으로 너의 새 집을 방문했던 날, 해가 지고 네게 다시 또 보자는 말을 남기며 나는 속으로 네게 미안하다는 말을 남겼다.
미안하다. 그때는 들리지 않았을 말을 다시 한번 말해본다. 이것 또한 들리지 않을걸 알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