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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교일기 #20] 왜 철분제를 사지 않니?

임신 18주, 아내가 원하던 배려, 내가 해준 배려

by Sylvan whisper

'자기, 이제 철분제 먹어야지. 얼른 사자'


철분제는 사실 임신 초기가 지난 직후, 임산부에게 필수적인 영양제이다. 태아의 혈액 형성에 꼭 필요한 영양소이고, 태아에게 이 영양소가 흘러가다 보니 산모의 빈혈을 일으킬 수 있어 산모의 건강을 위해서도 필수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임신 사실을 알게 된 직후에 시기별 영양제에 대한 정보도 이미 사전에 알아두었기 때문에 적정 시기가 되면 영양제를 구비하여 먹기만 하면 되는 상태였다.

우리가 계획했던 철분제 섭취 시작 시기는 대략 15주 차 내외였고, 18주 차가 시작한 시기까지 철분제를 구비하지 않고 미뤄왔으니 허울 좋게 계획만 세워놓고 아주 실망스러운 실행력을 보인 것이다.


나는 하루 이틀 시간이 흐르면서, 아내를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이 계속해서 쌓여갔다. 철분제를 비롯한 임신기간 동안 영양제를 사야 할 시기를 미리 체크하고, 계획했다. 각 영양제를 왜 먹어야 하는지, 각 영양소마다 그 영양소가 부족할 경우의 부작용까지 담아서 저장해 둔 것이다. 그리고 아내가 잊어버릴까봐 시기에 맞춰서 상기시켜 줬다. 내 딴에는 아내가 '먹기만 하면 되도록' 준비했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아니, 대체 왜 철분제 사러 약국을 안 가는 거야?'




이 아무것도 아니었던 일은 기어코 불씨가 되어 번지기 시작했다. 아내가 됐건 내가 됐건 누군가는 그저 약국을 들르기만 하면 아무 문제가 아니었을 일이었는데 이게 문제가 된 것은 둘 다 실행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출퇴근하는 도중에 아주 잠시 10분 정도만 우회했어도 약국에 다녀올 수 있었다. 아내 또한 집에 머무는 동안 잠깐 10~15분 정도 시간을 내서 외출을 다녀오면 약국에 다녀올 수 있었다. 아내와 나, 우리는 이 아주 작은 빈틈을 포착하여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대체 왜 철분제를 안 사는 거야?'

'아니, 철분제 하나 사다 주는 게 어렵나?'


서로가 하고 싶었던 말을 꽁꽁 숨기고, 서로가 원하던 바를 직접 꺼내놓지 않고 있었던 우린 그날 밤 결국 다시 다투게 되었다. 나는 내가 이만큼이나 준비했으니, 마무리 정도만 아내가 해주면 되는 것이었다고 했다. 아내는 내가 직접 행동으로 나서는 실천이 없으니 챙겨주는 게 없는 것과 같다고 했다. 나도 아내도, 우리는 서로가 가지고 있었던 생각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이날의 투닥거림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꽤나 공격적인 갈등으로 보인다.


'내가 해준 게 얼마나 많은데?' vs '실질적으로 해준 게 하나도 없는데?'




아내는 내심 내가 약국에 가서 사다 주기를 바랐다. 아내가 원한 것은 '영양제 챙겨 먹어'혹은 '이제 어떤 영양제 먹어야 해'라는 단순한 말이 아니었다. 아내에겐 먹어야 할 영양제 한알, 그리고 물 한 컵을 떠다가 가져다주는 그런 사소한 정성이 필요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실천의 정성'이었다. 아내가 원하는 것은 말뿐이 아니라 아주 작더라도 남편이 직접 행동으로 보여주는 정성을 느끼길 원했던 것이다. 고작 10분 거리의 약국엘 다녀오는 게 귀찮았던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우리의 대화가 서로에게 굉장히 공격적으로 느껴졌던 이유 그러니까 서로가 서로에게 너무나 엇갈린 서운함을 지니고 있었던 이유는 명확했다. 아내가 생각하는 배려와 내가 생각하는 배려가 완전히 다른 종류였던 것이다. 아내가 원하던 배려가 A였다면, 내가 공들이고 있었던 배려는 B였다. 때문에 우리의 주장은 둘 다 틀린 게 아니라 사실 둘 다 맞는 주장이었다. 나도 많은 노력을 하고 있었고, 아내도 받은 게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콜라를 원하는 아내에게 나는 계속해서 찬물만 가져다주고 있었다.


'원하지 않는 배려'가 극단으로 치우치게 된다면 그것은 어쩌면 '폭력'이 될 수도 있다. 상대가 원치 않는 배려, 이 불씨에 기름을 붓는 것은 '원하지 않는 배려'를 쌓아오는 본인의 모습에 심취하게 되는 것이다. 이를 방지하기 위한 것은 이번에도 또한 소통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원하는 배려가 무엇인지, 내가 해주고 싶은 배려가 무엇인지를 나눠야 '우리가 나눠야 하는 배려'라는 정답지가 나온다.


오늘도 나는 또 다른 교훈을 배웠다. 아내와 나의 관계에서도 원치 않는 배려라는 것은 서로가 쉽게 캐치하지 못할 수 있는 맹점이다. 또한 훗날 이는 우리 부부와 점점 성장하면서 자신의 가치관을 정립해 나갈 우리 아가와의 관계에서도 핵심이 되는 부분일 수 있다. 자주 다투는 우리일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우린 항상 그 다툼들을 통해서 배워 나가고 있다. 그게 우리를 더 성숙한 부부 성숙한 부모로 만들어주는 것이라고 믿는다.






한 줄 정보

1. 임신 15주 내외부터 철분 섭취가 권장되며, 이는 태아의 혈액 생성과 산모의 빈혈 예방을 위해 필수적이다.

2. 임신 중기 영양제는 복용 시점이 있기 때문에 시기별 체크와 준비가 중요하다.

3. 영양제 중 약국에서 구매할 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큰 차이이다. 의약품으로 분류 되느냐 식품으로 분류되느냐의 차이로 인한 것이므로 약국에서 구매할 수 있는 영양제가 효과가 더 좋을 수 있다.

4. ‘준비된 정보’보다 ‘실제 행동’이 더 중요한 케어일 수 있다. '실천적 도움'을 더 크게 체감하기 때문이다.

5. 부부 갈등은 아주 작은 생활 단위에 의해서도 쉽게 촉발될 수 있다.

6. 임신기 부부는 상대가 원하는 케어 방식과 자신이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방식이 쉽게 엇갈릴 수 있다.

7. 남편은 “충분히 준비했다”고 생각해 만족감을 느끼지만, 아내는 “정작 받는 게 없다”고 느낄 때 서운함이 극대화된다.

8. 태아는 이제 혀의 미뢰가 생겨 양수를 통해 엄마가 먹는 음식의 맛과 냄새를 느낄 수 있다.

9. 산모는 질 분비물이 증가하는 현상이 생긴다. 에스트로겐이 증가하면서 생기는 현상이므로 당황스러울 수 있으나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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