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 17주 차, 김치찌개와 비몽사몽 산책
오늘은 이상하리만치 의욕이 넘쳤다. 퇴근하여 집에 가면 기본적인 집정리부터 시작하여 집안일을 싹 다 끝내고, 저녁식사도 제법 알차게 차려줘야지 아내가 전부터 김치찌개를 먹고 싶어 했으니, 장모님께서 주셨던 김치로 맛있게 끓여봐야겠다. 그리고 이제부턴 밤마다 같이 산책을 나가기로 했으니까 식사를 하고, 집 앞 공원을 한 바퀴 돌고 와야겠다.
별거 아닐지 모르겠지만 퇴근하고 난 뒤의 '내 일상을 오롯이 아내에게 주고 싶다', 혹은 '내 일상의 중심에 아내를 두고 싶다.' 같은 느낌이었던 것이다. 사무실에서 이런 생각이 별안간 강력하게 찾아와서, 넘치는 의욕과 의지를 안고 퇴근하여 집으로 향했다. 또한 의기양양하게 아내에게 미리 메시지도 보내놨다. 아내가 먹고 싶어 했던 김치찌개를 해주겠노라고 말이다.
'자긴 가만히 있어, 내가 다 할게!'
집에 도착한 나는 아내를 소파에 앉혀놓고 당당하게 외쳤다. 오늘은 내가 다 해줄 테니까 가만히 있으라고 말이다. 아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리를 시작하려는 내 옆에서 설거지를 시작했다. 우리 부부의 습관과 같은 모습이었는데, 누구 한 명이 요리를 하면 그게 아내이건 나이건 나머지 한 명이 쪼르르 부엌으로 와서는 도와줄 구석을 찾는다.
나는 오늘 해주고 싶은 일들이 꽤나 많았기 때문에 저녁상 차리기 과제도 얼른 끝내고 싶기라도 했는지, 잘하지도 못하는 칼질을 거침없이 퍽 용감하게 이어갔다. 그런데 이게 화근이었다. 이제 막 김치찌개를 만들기 위한 초기 단계였던 양파를 썰던 도중 손가락을 베여버린 것이다. 사실 조금 베인 정도가 아니라 거의 손가락 끝부분을 잘라버렸다고도 할 수 있을 정도로 사고를 쳤다.
'으이구 조심좀 하지!'
어찌나 순식간이었는지 처음 손가락을 베이고 몇 초간은 피가 나질 않았는데 잠시 후 엄청난 쓰라림과 함께 피가 멈추지 않고 계속 흘렀다. 내가 응급처치(?)를 하는 사이, 아내는 설거지를 하던 것을 멈추고 김치찌개 만들기에 돌입했다. 지혈을 끝내고 밴드를 붙이고 쓰라림이 조금 멎고 나니 사실상 김치찌개는 팔팔 끓이기만 하면 되는 단계에 들어갔다. 그러니까 '요리'는 사실상 끝이 났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오늘의 저녁상은 내가 시작만 걸어주고는 아내가 완성한 것이 되어버렸다. '아내를 위한 저녁상'을 아내가 차려버린 것이다.
지금 생각해 봐도 스스로가 어이없었던 것은 그 김치찌개의 맛이 너무나 좋았던 나머지 나는 국물맛을 보고는 몸이 제멋대로 소주 한 병을 식탁에 가져왔다. '자기가 너무 맛있게 끓여버린 탓이야'라고 말했더니 아내는 피식 웃었고, 우리의 저녁식사는 그렇게 완성되었다.
나는 긴장이 풀린 탓인지, 피로가 쌓인 탓인지 소주 한 잔과 김치찌개로 식사를 마치고는 스르륵 잠에 빠져버렸다. '아니, 집안 정리는 어쩌고? 이제 설거지라도 내가 해야지!' 내가 얼마나 철이 없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그렇게 원대했던 꿈이 중간 단계에서 막을 내리고 초저녁부터 잠에 빠져들었지만 내겐 아직도 처음 불현듯 찾아왔던 그 '의욕'이 남아있었나 보다. 깊은 잠에 빠졌음에도 아내와 약속했던 산책을 나가야 한다며 다시 깨어나서는 주섬주섬 옷을 입기 시작한 것이다. 평소 같았으면 선잠을 잤더라도 잠에서 깬 뒤 시간이 좀 지나면 몸이 깨어날 텐데, 이날은 술기운 때문인지 도무지 잠에서 깰 생각을 안 했다. 아무래도 정신은 반쯤 깨어나고 눈은 떴지만, 두 손과 발이 너무 무거웠던 것이다. 아내도 내가 피곤해 보인다며 그냥 아침까지 쭉 잘 것을 권유했지만 아직 남아있던 나의 이 바보 같았던 '의욕'을 막진 못했다.
우린 늦은 밤이 되기 전, 같이 손을 잡고 산책에 나섰다. 내 손가락 끝엔 대일밴드가 붙여져 있었고 슬리퍼를 질질 끄는 두 발에는 술기운에 묻어있어서 보이지 않는 미세한 떨림을 동반했다. 정신도 딱 절반만 깬 상태였지만 그래도 우리는 소박한 담소를 나누면서 공원을 끝끝내 한 바퀴 모두 돌고 나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나는 아마도 산책을 끝마친 뒤 집에 돌아와서 곧바로 다시 잠에 빠졌다. 그래도 밴드가 붙여져 있던 손바닥에는 아내의 손에서 전해져온 체온이 선명하게 남았다.
아내에게 오늘의 나는 어떤 모습으로 기억에 남았을까. 사고뭉치 남편이었을까? 아니면 마음만큼은 착한 남편이었을까? 아내에게 내가 어떤 인상으로 남았건 간에, 이렇게 아주 작고 소소한 에피소드지만 그럼에도 분명하고 선명한 추억이 생긴 것이 내겐 퍽 만족스러운 날이었다.
한 줄 정보
1. 임신 중기에는 남편이 가사·집안일을 더 적극적으로 분담하는 경우가 많다.
2. 임신부는 단순한 집안일이나 외출 준비에서도 피로도가 빨리 쌓일 수 있다.
3. 임신 시기에는 부부가 하루 일과의 리듬을 맞추기 위해 가벼운 산책을 루틴으로 도입하는 경우가 많다.
4. 하루 일정 속 작은 사고(손 베임, 피로 누적)는 부부 관계의 유대감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5. 임신 중 산책은 혈액순환·기분 안정·수면 개선에 도움이 되는 대표적 활동이다.
6. 부부의 일상은 출산을 앞두고 ‘함께 하는 루틴’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재편된다.
7. 사고를 치더라도 아내에게 잘해주고 싶은 마음 자체가 부부 관계의 따뜻함을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