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어둠이 건네준 희망

by 챌린지언

그림을 그려 번 돈으로 밥을 먹고 살 때의 일이다.


"지언아, 빛을 그리려면 말이다, 어둠을 그릴줄 알아야 된다."


조용한 작업실에 나의 깊은 한숨이 고요히 퍼지자, 지켜보고 계셨던 선생님이 검은색 물감을 푹 찍어 바른 커다란 붓으로 내 습작 한 귀퉁이를 무심하게 쓸어내리며 말씀하셨다.


"빛과 어둠은 떼어낼 수 없는 존재라서 늘 함께 다니거든? 빛을 강조하고 싶다면, 어둠을 과감하게 눌러주는 용기가 있어야 해. 자! 봐라, 그림이 확 살아나지?"


당시의 나는 칙칙한 내 삶에도 밝은 희망이 가득하길 바라며, 온통 밝은 빛의 색으로 가득 찬 그림을 그렸었다. 보기에 나쁘진 않았지만, 그림 한 장을 완성하기 위해 몇 달을 붙들고 늘어져도 어딘지 모르게 아쉽고, 왠지 모르게 허전하고, 도무지 완성이 되지 않아 답답해하던 중 벌어진 일이다.


그저 밝기만 했던 나의 그림에 어둠이 짙게 깔리자, 선생님의 말씀처럼 그림이 확 살아났다. 마법가루라도 뿌린 것처럼 순식간에 따뜻한 햇살이 반짝이는 그림이 되어, 마치 그림 속 인물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어둠을 통해 빛을 표현하다니! '밝아야 한다'는 강박이 있던 나에게 한 장의 그림이 알려준 그날의 교훈은, 한 소녀의 뇌리에 깊이 새겨졌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언젠가부터 슬픔과 고통을 인정하지 않고, 긍정을 강요하는 문화가 생겨버린 듯하다.

단군이래 가장 돈 벌기 쉬운 세상에 살고 있음에도 여전히 가난한 것은 당신이 게을러서, 긍정적인 생각을 하지 않아서, 간절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라며 불안을 증폭시킨다.


매일 긍정확언을 하고, 감사일기를 쓰고, 새벽같이 일어나 꿈을 100번씩 적으면 인생이 달라진단다. 생각을 바꾸면 행동이 바뀐다는 말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자신을 정확하게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무조건 긍정적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더 깊은 무기력과 상처를 남기고 결국 자신이 누구인지 잃게 만들어 버린다.


나도 한때는 매일 100번씩 꿈을 적고, 긍정확언을 하고, 감사일기를 썼던 시절이 있었다. 정말 간절하고 절실한 마음에 20년 가까운 세월을 그렇게 살았다. 그러나 내 삶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두꺼운 가면으로 나를 감춰버리는 일에 능숙해졌을 뿐이다. 나조차도 나의 아픔을 눈치채지 못하게.






해묵은 무기력과 불안, 우울감 등으로 삶이 완전히 무너져버린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조건적인 긍정이 아니다. 꽉 막혀 있는 감정을 와르르 쏟아내고, 깨져버린 기억의 파편을 쓸고, 버리고, 닦아내며 폐허가 되어버린 터전을 다시 가꾸어 나갈 수 있도록 말끔하게 정리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생각의 패턴을 바꾸기 위해서는 나를 있는 그대로 마주하고, 무너져버린 감정과 뒤엉킨 기억 속에서 나는 어떤 생각과 선택을 반복해 왔는지, 무엇을 두려워하고 외면하려 했는지를 찬찬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표면적인 긍정이 아닌, 진짜 회복과 변화를 원한다면 말이다.


원하는 미래를 상상하며 이미 이루어졌다고 긍정 확언을 하기 전에, 하루 3가지 감사한 일을 찾아 나서기 전에, 나의 어둠을 인정하고 바라볼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때로는 어둠이 빛을 강조해 주기도 하니까.






keyword
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