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보다 돈을 먼저 걱정하며 암보다 가난이 더 무섭다고 주장(?)하는 것이, 생과 사의 최전선에서 온 힘을 다해 맞서고 있는 누군가에겐 그저 복에 겨운 소리로 들릴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암 수술을 받고 벼락백수가 되어 쉬는 날이 길어질수록, 가난은 암세포보다 빠른 속도로 무한 증식 해나가며 전에 없던 신체적 반응까지 동반해 더욱 거센 불안 속으로 나의 삶을 몰아가고 있으니, 나에겐 가난이 암보다 더 무서운 존재임은 확실한 듯하다.
그나마 나의 암 기수(자궁경부암 1b2)는 생존율 99.9%에 가깝기 때문에 글이라도 쓰는 호사를 누리고 있지만, 만약 항암치료와 방사선 치료를 병행해야 했다면, 혹여 지금보다 훨씬 병이 진행된 이후에 발견을 했다면, 아마 지금보다 훨씬 강도 높은 불안에 휘둘려야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마음에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것과 같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나에게는 무수히 많은 시한폭탄이 존재한다. 사실 내가 진짜 두려운 것은 가난이 아니라, 내가 안고 살아가고 있는 이 시한폭탄이다. 이것들이 나의 삶의 전반을 거쳐 지대한 영향을 미쳐왔기 때문이다.
불안감과 우울감은 경제적 어려움과 깊은 연관이 있다. 세계보건기구(WHO)와 여러 국가의 보건 연구에서 '가난은 우울증과 불안장애의 주요 위험 요인'으로 분석된 바 있으며, 미국 정신건강연구소(NMH) 연구에서는 저소득층이 우울증을 겪을 확률이 중산층이나 고소득층보다 훨씬 높다는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뿐만 아니다. 소득 불평등이 심한 사회일수록 불안과 우울이 더 흔하다는 점을 지적한 연구 사례도 있다. 가난 자체보다 '상대적 박탈감'이 더 큰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불안감과 우울감이 높은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쉽게 중독에 빠지기도 한다. 알코올중독, 쇼핑중독, 약물중독, 도박중독, 스마트폰중독 등 다양한 중독의 유혹의 손길을 쉽게 통제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악순환의 연속이다.
앞서 이야기한 특징은 그대로 나의 삶에 투영되어 있다. 지금이야 SNS의 발달로 월 천만 원을 번다는 이야기가 만연한 시대가 되었지만, 나의 경우 월 천만 원을 벌기 위해선 쉬는 날이 없이 잠을 자고 밥을 먹는 시간 외엔 온통 일에만 매진해야 겨우 가능한 것이었다.
내가 일만 하면서 지냈던 이유는 바로 존재불안과 유기불안 때문이다. 내가 처음 목표한 바를 이루었을 때, 마치 '지언아, 넌 세상에 꼭 필요한 존재란다'하며 나의 존재를 인정받는 것만 같았다.
무엇을 해도 채워지지 않던 공허한 마음이 그제야 조금 채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 일을 계기로 더 높은 목표를 세우고, 더 많은 성과를 이루며 일을 통해 '내가 태어난 이유'를 끊임없이 확인해 나갔다.
'일'은 내 마음을 알아주는 친구였고, 기댈 수 있는 부모였고, 가장 빛나는 보석이었고, 제일 재밌는 놀이였다. 직업을 네다섯번은 족히 바꾸었지만 어떤 일을 하던 나는 그 일을 사랑했고, 해당 분야에서 주목할만한 성과를 이루었고, 신기루와 같았던 월 천만 원의 수입도 내 손에 들어왔다. 그러나 나는 늘 가난에 허덕였다.
내가 사업을 했을 때의 일이다. 탄탄대로를 달리는 것 같았던 나의 사업은, 기억조차 나지 않는 사소한 실수로 붕괴되기 시작했다. 운영하던 매장은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고, 사랑했던 사람과의 이별까지 겹치며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린 끝에 멀쩡했던 양쪽 송곳니가 전부 빠져버렸다.
그러나 그 시기 내가 가장 황당하고 비참했던 건, 나의 전부와 다름없던 일터가 사라진 것도, 사랑했던 사람과의 이별도 아닌, 매달 천만 원이 넘는 큰돈을 벌었음에도 수중에 단돈 백만 원이 없어 2년 가까이 임플란트 치료조차 받지 못하는 현실이었다. 그렇다고 값비싼 명품을 사들인 것도 아니고 도박은커녕 핸드폰 게임조차 하지 않는데, 그 많던 돈이 대체 다 어디로 사라지고 없는 것일까?
이와 비슷한 사건은 내 삶에서 수도 없이 자주 등장해 그 이야기 만으로도 책 한 권은 눈 감고도 써 내려갈 수 있을 정도다.
나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통해 더 빠르게 많은 돈을 버는 법을 알게 되었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을 통해 더 나은 삶을 살지는 못하고 있다.
암 진단을 받기 두 달 전 나는 공황장애와 번아웃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졸지에 암환자까지 되고 나니, 스스로를 비난하고 원망하는 것 말고는 딱히 하는 일도 없이 고작 5평 남짓한 방에 갇혀 여전히 빚에 허덕이며 도미노처럼 나의 삶이 쓰러지고 있는 것을 멍청하게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사람들이 왜 빚에 허덕이는지 이해하려면 이자율을 공부할 것이 아니라 탐욕과 불안, 낙천주의의 역사를 공부해야 한다. 투자자들이 왜 약세장 바닥에서 자산을 팔아버리는지 이해하려면 미래의 기대수익 계산법을 공부할 것이 아니라, 가족들을 지켜보아야 한다. 나의 투자가 우리의 미래를 위험하게 만들고 있는 건 아닌지 의구심을 갖고 그 고통을 생각해보아야 하는 것이다.
모건하우절의 책 <돈의 심리학> 초반부에 소개되어 있는 내용이다. 이 구절을 읽으며 내게 미해결 과제로 남아있는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를 해결하지 않으면 월 천만 원이 아니라, 수십억을 벌어들인다고 하더라도 평생을 가난하게 살아갈 것이라는 걸 단번에 직감할 수 있었다.
내가 불안하고 우울해서 가난하게 사는 것인지, 가난하기 때문에 불안하고 우울해진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나 스스로 계속 같은 패턴을 반복하며 삶을 점점 위태롭게 한다는데 있다. 이제라도 회피하기 급급했던 마음의 시한폭탄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해체하는 작업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나의 마음을, 나의 가족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동안 억압되었던 아픔과 슬픔이 단 며칠 만에 해소될 리 만무하지만, 나를 돌아보고 치유하는 글쓰기를 통해 조금씩 해갈되어 가는 것을 느끼는 요즘이다. 암환자가 된 덕분에 나의 삶을 돌아보고, 나의 아픔을 치유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 것이 감사하기까지 하다.
9편의 짧은 에세이를 쓰면서 내가 진정으로 바랬던 것은 '성공'이 아니라 '평안'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정말 죽을힘으로 최선을 다해 살았기 때문에 후회는 없다. 다만 그렇게 최선을 다해 살아왔는데 주어진 결괏값이 갚아야 할 빚과 암 진단서뿐이라는 것이 허망하다.
내게 또 한 번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전과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지금과는 다른 결과를 맞이하기 위해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다음 편에서는 내가 가지고 있는 돈에 대한 생각과, 돈 사용 방식을 조금 더 면밀히 살펴보며 심리적 패턴이 개인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구체적으로 다루어 볼 생각이다.
나아가 내가 했던 물음에 대한 답을 얻고, 좇아야 할 이상을 발견하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