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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맞다, 나 자궁이 없지?

by 챌린지언 Feb 28.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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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궁경부암 수술을 받은 뒤로 지나치게 몸의 변화에 예민해졌다. 매 시간마다 림프 곳곳을 주무르며 응어리가 생긴 곳은 없는지 살피는가 하면, 틈만 나면 '암 전조 증상'을 찾아보며 불안해한다던가, 도통 사그라들지 않는 림프절 통증과 턱 주변 여드름 때문에 2주에 한 번씩 피검사를 하고, 그것도 모자라 피부에 있는 점의 위치나 모양을 지속적으로 체크하는 습관이 생겼다.


그런 나에게 한 가지 걱정거리가 있었는데, 바로 생리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초경이 시작된 이후로 단 하루도 날짜를 어기는 일 없이 찾아왔던 대자연의 날인데, 어쩐 일인지 소식이 없어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다 두 달의 시간이 흘렀다. '혹시 수술이 잘못된 것은 아닐까?' 불안한 마음에 처음 진료를 받았던 산부인과에 전화를 걸었다.


"제가 그 병원에서 자궁경부암이 의심된다는 소견을 받고, 두 달 전에 대학 병원에서 자궁적출 수술을 받았는데요, 아직 생리를 안 해요."


"환자분이 자궁 완전 절제를 하셨다면 생리를 하지 않는 것이 정상이긴 합니다. 호르몬 치료를 원하시는 건가요?" 전화를 받은 직원 분이 약간 당황하신 듯 이야기했다.


"아, 맞다! 나 자궁이 없지? 죄송해요, 감사합니다!"


나는 멋쩍어하며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 '으이그, 나이를 어디로 먹었니, 이 맹추야!'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머리를 콩 쥐어박았다. 자궁이 없으니 생리를 하지 않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데, 온갖 암 전조 증상 따위를 검색하며, 달을 마음앓이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졌다.






수술 후 한 달이 지난 시점부터 갑자기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고, 피부가 부쩍 푸석해지는가 하면, 무릎 관절이 삐그덕 거리기도 하고, 잠에 드는 것이 어려워 밤새 몸을 뒤척거린다거나, 어렵사리 잠에 들어도 서너 시간 뒤 다시 깨어나기 일쑤였고, 이유 없이 눈물이 터져 나온다거나, 턱 주변에 멍게 같은 여드름이 잔뜩 올라와 사라질 생각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이 전부 다 자궁의 부재로 인한 증상이라니...!


나는 당장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호들갑을 떨며 내가 폐경임을 알렸다.


"엄마, 엄마! 나 이제 자궁이 없어서 생리를 안 한대! 나 이제 폐경이야!"


엄마는 호들갑을 떠는 나와는 상반되게 차분한 목소리로, 아이고, 짧은 탄식을 뱉으며, "폐경이 오면 빨리 늙는데... 관리 잘해야겠다." 하시곤 그렇잖아도 예민한 나에게 갱년기 우울증까지 겹칠까 염려하며 호르몬 치료를 받을 것을 권유하였다.


나는 반사적으로, "난 동안이라 괜찮아!"라고 너스레를 떨었지만, 문득 거울을 보니 푸석한 얼굴과 턱 주변 여드름이 눈에 거슬렸다. 나는 괜히 늘어진 볼을 위쪽으로 쓸어 올리, 요즘 이런저런 증상이 있었는데 자궁이 없어서 그런 줄은 꿈에도 몰랐다는 둥, 요즘 내가 겪고 있는 증상들을 와르르 쏟아내었다.


그러곤 말 끝머리에 "엄마는 갱년기 증상이 없었지?" 하고 물었는데, 아뿔싸.

"없긴 왜 없어? 엄마는 호르몬 치료받았잖아. 너도 병원 꼭 가서 치료받아."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요즘 이놈의 여성 호르몬이 널을 뛰는 통에 하루에도 수십 번 천국과 지옥을 오가고, 멀쩡히 밥을 먹다가도 눈물이 왈칵, 재밌는 예능 프로를 보다가도 왈칵 눈물이 쏟아져 내리곤 하는데, 엄마가 갱년기로 병원을 들락거리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그냥 지나쳤다니...


그러고 보니 덥다고 옷을 훌렁 벗었다가, 뒤돌아서 춥다고 다시 옷을 껴입기도 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지밖에 모르는, 남보다 못한 이 무심한 딸년이 얼마나 밉고 서운했을까,





암 진단을 받기 전 서너 달간 비정상적으로 생리 양이 많아졌던 것을 제외하곤 생리통이나 생리 전 증후군으로 고생을 한다거나, 생리불순 같은 증상은 전혀 없었던 터라 여태껏 월경에 대한 큰 스트레스는 없었지만, 매 달 치르던 의식을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니 어쩐지 시원 섭섭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런 준비 없이 초경이 져버려 민망했던 기억, 그 민망함에 삐쭉거리는 나에게 '이제 진짜 여자가 되었다'며 장미꽃 한 송이와 케이크를 건네주던 엄마와의 추억, 자고 일어나 조바심 내며 이불을 요리조리 살펴보았던 날들, 서툰 손바느질로 전용 파우치를 만들었던 기억 같은 것들을 떠올리며 서랍 한가득 쟁여놓았던 여성용품들을 동네 주민 분들에게 나눔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나는 그동안 애쓴 나의 자궁에게 애도를 표하며, 한편으론 대자연의 마법에서 풀려난 것을 기념하며 작은 케이크 하나와 꽃 향기 가득한 디퓨저를 사들고 돌아왔다. 


배꼽 아래쯤 어딘가를 어루만지며 '이 즈음에 자궁이 있었겠지? 네가 아픈 걸 몰라줘서 미안했어. 잘 가, 고생했어.' 하며 케이크를 한 입 먹었다.





여자라면 그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자연스러운 호르몬의 변화이니 그리 슬퍼할 이유도 없거니와, 나 혼자만 겪는 특별한 사건도 아니라 장황하게 풀어낼 이야기도 없지만, 한 가지 조금 특별한 것이 있다면

아직 지우지 못한 여성 달력 어플에서 '이번 달 예정일은 N일입니다.' 하며 알람을 보내올 때마다 주르륵 눈물이 난다는 것이다. 아무튼 슬퍼서 우는 건 진짜 아니다.


주치의 교수님은 하도 요란스럽게 구는 나에게 '그렇게 사소한 일들까지 너무 신경 쓰고 살면 본인만 피곤하 다고, 너무 작은 것들에 매달리지 말고, 긴 호흡으로 넓은 시야를 가져보라'라고 했다.


"맞아요 교수님, 제가 좀 그런 면이 있죠. 좋아지겠죠 뭐..." 하고 대답했지만,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것이  그만 속이 상해, '작은 디테일 하나가 얼마나 중요한데, 그런 것도 모르고 어떻게 대학교 교수씩이나 됐담? 흥!' 콧방귀를 뀌었다.

 

우리 몸속 세포가 전체적으로 새로워지는 주기는 6개월 정도 소요된다. 교수님이 사소한 것에 신경을 끄고 길게 보자고 거듭 말씀하셨던 것도, 우리 몸이 새로운 세포를 만들어 내는 것에는 시간이 필요한 법이니, 본래 가지고 있는 치유의 힘을 믿고 기다려 보자는 뜻이었을 거다.




인간은 아주 작은 세포 하나에서부터 시작된다. 그 세포 하나는 여자의 자궁 안에서 무려 열 달 동안 둘로, 넷으로, 그렇게 수십 조개로 나누어지며, 귀한 생명을 탄생시킨다.


나는 이제 내 몸에서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는 신비롭고 귀한 경험을 영원히 할 수 없게 되었지만, 생명을 품을 자궁이 없으면 좀 어떤가, 생명력을 가진  이야기를 품을 마음이 있는데.  


무려 반평생 품고 있던 말들을 하나둘씩 꺼내어 나를 쏙 빼닮은 글로 탄생시켜 나가고 있으니, 언젠가 나를 닮은 아이가 생기게 된다면 부르고 싶었던 '세련'이라는 이름을 영영 부르지 못하게 된 것을 마냥 아쉬워하기보다, 세련된 글을 세상에 태어나게 해 보면 어떻겠냐고 스스로를 다독여본다.


서투르거나 어색한 데가 없이 능숙하게 잘 다듬어진 글 말이다.




내가 트레이너가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우리나라 최고의 권위자에게 생물학 수업을 들었던 적이 있는데, 그때 들었던 인상 깊은 말을 공유하며 이번 글을 갈무리해 본다.


우리 몸속에 있는 37조 개가 넘는 세포는, 광활한 우주에 떠 있는 별보다 많다. 그리고 그 무수한 세포들은 언제나 당신의 건강과 행복을 위해 움직이는 든든한 지원군이자 조력자다.


삶이라는 전쟁터에서 홀로 외롭게 싸우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는, 당신 안에 있는 37조 명의 병사들이 당신과 함께 싸우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당신은 우주보다 더 큰 힘을 지니고 있다.

자신을 믿고 나아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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