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핍과 불안은 나에게 무한한 동력을 제공해 주는 원천이기도 하지만, 방심하는 순간 나의 숨통을 쥐고 흔드는 잔인한 녀석이 되어 나의 삶을 위협하곤 한다.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만, 나에게는 존재 자체를 부정당했던 사연이 있다. 제대로 치유하지 못한 아픈 기억은 시와 때를 가리지 않고 나를 찾아와 낮에는 내 손과 발을 꽁꽁 묶어 꼼짝을 하지 못하게 했고, 밤에 잠을 자는 법도 없이 쉬지 않고 나를 짓눌렀다.
거친 불안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칠 때면 나의 불안은 기다렸다는 듯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의 헨들을 꽉 붙들고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벼랑 끝을 향해 신나게 질주한다. 내가 핸들을 내어준 것인지, 불안이 빼앗은 것인지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앞서 이야기했지만, 나는 '암'이라는 병 앞에서도 일을 놓지 못하는 지독한 일 중독자였다. 일로서 나의 존재를 증명하고, 인정받고 싶다는 '일을 향한 끊임없는 갈망'은 언제나 나를 성공으로 이끌어 준다고 믿었다. 마치 분홍신처럼.
그러나 나의 믿음은, 때때로 가장 높은 곳에서 나를 단숨에 추락시켜 버리는 사악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살아서는 브레이크가 고장 난 차에서 내릴 수 없다는 걸 알려주고 싶기라도 한 걸까?
나는 지금 꼼짝없이 추락하는 중이다.
쉬지 않고 달려온 곳이 벼랑 끝이었다니...
끝없는 절망 속으로 떨어지며 생각했다. '나는 왜 태어났을까?'
사실 나의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하는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이것은 나의 가장 오래된 습관 중 하나이며, 내 첫사랑의 주인공이자, 내게 칠흑과도 같은 어둠을 선물한 아빠와도 관련이 깊다.
아빠는 나와 엄마에게 한없이 다정했던 사람이었다. 말갛고 큰 눈엔 항상 나와 엄마에 대한 사랑과 애정이 꿀처럼 흘러넘치곤 했었다. 도무지 믿기 힘든 일이 생기기 전까진 말이다.
IMF 위기로 대한민국 전체가 휘청이던 시기, 그는 매일 밤 술에 절어 휘청이며 아무렇게나 폭력을 휘둘러댔다. 꿀이 흐르던 눈빛은 어느새 벌겋게 달아올라 악마처럼 변해갔고, 무차별적으로 오가는 폭언과 폭행 속에서 나는 국가 부도에 대한 상실감과는 비교할 수 없는 충격과 공포에 떨며 매일 밤 경찰에 도움을 요청하는 전화를 걸었다.
매일 밤마다 나를 낳아준 어미가 피투성이가 되는 것을 보고만 있어야 한다는 무력감과, 나를 존재하게 한 아비를 제 손으로 경찰에 넘겨야만 하는 그 참혹한 심정을, 아마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그런 난리통에 나는 차마 입에 담을 수도, 믿을 수도 없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게 되었는데, 내가 엄마 뱃속에 있을 때, 아빠라는 작자가 술에 취해 만삭인 엄마에게 휘발유를 뿌리며 난동을 부린 적이 있다는 것이다.
이후로 겁에 질린 나는 엄마에게 제발 이혼하면 안 되냐고 사정했다. 정확한 이유를 알 순 없지만 엄마는 아빠와 이혼과 재혼 다시 이혼을 반복했고, 빚쟁이들을 피해 여기저기 전전했다.
거듭되는 공포와 충격, 가난 속에서 고작 열 살인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세상에 태어난 것을 원망하는 것 말곤 없었다. 악마 같은 저 사람의 자식이라는 사실이 끔찍해 스스로 삶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아 그저 매일 밤마다 눈을 감고 저 사람을 죽이는 상상을 했다. 그리곤 두 손 모아 간절히 빌었다. '제발 아침이 오지 않게 해 주세요. 제발요.'
이 모든 것이 가난, 돈 때문이다.
"너는 어쩜 하는 짓이 네 아빠랑 똑같니?"
우리 세 식구가 아직은 화목하고 행복하던 때, 장난기 많고 만들기 좋아하는 나를 보며 엄마는 웃으며 이야기했다. 너는 아빠를 참 많이 닮았다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아빠를 닮았다는 이야기는 내겐 세상을 다 가진듯한 황홀함을 안겨 주었지만, 모든 것이 다 변해린 이후 그 말은 비수가 되어 내 심장 한가운데 꽂혔다.
열 살 이후로 나는 '아빠와 닮은'나의 모습을 지워내려 부단히 애썼다. 할 수만 있다면 내 몸에 흐르는 그의 피를 전부 다 쏟아내고 싶었다. 그런 나의 애절함을 알아줄 리 없는 그는, 종종 술에 취해 전화를 걸어왔고, 나는 단 한 번도 응답하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21살 겨울, 수능을 치른 기념으로 만들어진 식사 자리에서 10년 만에 처음 아빠를 만났다. 테이블 위엔 어색함만이 놓여 있었다. 우리는 대충 식사를 마무리하고 또 어색한 이별을 했다.
그날 새벽에도 어김없이 전화벨이 울렸다. 나는 아빠의 술주정이 듣기 싫어 모른 체 넘겼고, 전화벨은 포기할 생각을 하지 않고 수십 번은 더 반복하다 이윽고 엄마 방에도 전회벨이 울렸다. 엄마는 체념한 듯 이 시간에 또 왜? 한심한 어조로 전화를 받았다.
"아 네, 여기 **병원 응급실인데요, 지금 이철안 씨가 뇌출혈로 쓰러지셨어요."
10년 만에 아빠를 다시 만난 그날 저녁, 아빠는 뇌출혈로 쓰러져 뇌사상태에 빠졌다. 낡은 점퍼 주머니에서는 타이레놀이 한 움큼 발견됐다고 했다.
한때 꿀이 넘쳐흐르던 아빠의 큰 눈은 오랜 시간 악에 바쳐 벌겋게 달아있더니, 지금은 죽은 생선의 그것처럼 초점을 잃고 누렇게 바짝 말라비틀어져갔다. 그렇게 한 달 정도 지났을까? 의사는 내게 '뇌사 판정서'라는 제목이 적힌 종이를 내밀었다. 10년간 빌고 또 빌었던 그의 죽음이 내 손에 달려있다니...
의사는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지금 다 털어놓으라고 말하곤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나는 말없이 그의 시커멓고 뭉툭한 손을 한참 바라보았다.
나를 어여쁘다 어루만져주던 손, 내게 책상이며 책꽂이며 뚝딱 만들어주던 손,... 집기를 마구 부수고, 폭력을 일삼았던 그 손.
'마지막'이라는 단어는 참으로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다. 10년을 하루도 빠짐없이 증오하던 그 손을 한 번 잡아보고 싶었다.
그의 거칠고 뭉툭한 손 위에 방금 전 뇌사판정서에 사인을 하고 온 내 손을 슬며시 포개자, 어째서인지 그의 말라비틀어진 눈가에 슬며시 눈물이 맺혔다. 그리곤 삐- 하는 소리와 함께, 호흡기가 떨어졌다.
벌써 스무 해가 흘러 마흔이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그 시절의 일들이 떠오른다. 나는 아직 아픈데, 엄마는 괜찮으냐고 물어보고 싶지만, 차마 겁이 나서 묻지는 못하고, 아직도 밤마다 작게 신음하는 엄마의 잠꼬대로 상황을 짐작할 뿐이다.
내가 느끼는 존재불안 (Existential Anxiety)은, 삶의 본질적인 질문과 관련된 불안을 의미한다.
이는 삶의 의미, 죽음, 자유, 책임 등과 같은 근본적인 문제에서 비롯되는데, '내 인생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나는 왜 태어났을까?'에 대한 질문이 아버지의 죽음을 경험하며, 삶의 선택과 그에 따른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는 압박감으로 변해버린 후에 발현되었다. 나는 이런 연유로 자주 무력감과 우울감을 느낀다.
내게 불안은 마치 가을이 지나면 겨울이 오는 것처럼 아주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현상이기도 하다. 내가 가진 불안의 여러 이름 중, '존재불안'은 꽤나 불쾌한 감정이긴 하지만, 나 스스로를 성장시키고 삶의 방향성을 찾는 계기가 되어 준 고맙고 소중한 친구이기도 하기에 대놓고 미워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겨울이 찾아왔다. 이번 겨울은 유난히도 춥고 황량한 바람이 분다.
나는 가만히 봄이 오길 기다리며 휘몰아치는 바람에 기꺼이 몸을 맡긴 채, 울고 싶으면 울고 마음껏 글을 써 내려갈 작정이다.
어쩌면 삶의 의미는 거대한 발견이 아니라, 하루하루의 작은 행동에서 찾아질지도 모르니.
그렇게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아가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이번 에피소드는 쓰면서도 너무 힘이 들어 다시 읽어보지 못하고 발행합니다. 다소 어색한 부분이 있더라도 양해 부탁드립니다. 무거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