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라이킷 24 댓글 4 공유 작가의 글을 SNS에 공유해보세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숨고 싶진 않은데, 도망치고 싶어.

by 챌린지언 Feb 27. 2025
아래로

2024년 10월 30일. 이 날은 암세포가 생긴 자궁을 떼어내는 날이었다.


아직 미혼인 내가 자궁을 완전히 절제하는 결정을 내리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그렇잖아도 불안이 심한 내가 '혹시라도 암이 재발되면 어쩌지?'불안에 떨며 살아갈 것이 불 보듯 뻔하여 차라리 없는 편이 낫다고 생각되었다.


앞으로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 생기면 어떡하냐며 진심으로 걱정해 주고,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고 만류하는 이들도 있었다. 나라고 그런 고민을 왜 하지 않았겠는가.


짐작했겠지만, 나는 결혼에 대한 환상보다 두려움이 훨씬 더 크다. 내게 결혼은 안정적인 울타리가 아닌, 작은 요동에도 쉽게 깨져버리는 항아리 같은 것이었, '불안정한 결혼'보다는 '안정적인 이별'을 선택해 왔던 나였기에, 자궁을 완전히 떼어내는 선택은 나에겐 그리 이상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모성애 때문인지, 내가 나이를 먹어가고 있어서인지, 자신을 꼭 닮은 아이를 낳아 기르는 친구들의 모습을 보며, 나도 나를 꼭 빼닮은 딸아이가 한 명쯤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도 사실이다.


언젠가는 만나게 될지도 모를 나의 귀여운 아이를 상상하며, 세상을 살아가면서 <서투르거나 어색한 데가 없이 능숙하고 미끈하게 갈고닦아 나가라>는 의미로 '세련'이라는 이름도 지어놓았다. 그러나 이제 와서 이런 게 다 무슨 소용인가.






"조신하게 있던 여자들도 다 그 병에 걸린다더라, 네 잘못이 아니야."


제 쓰임을 다하기도 전에, 그만 병이 생겨 주인에게 버려지는 나의 자궁을 애도할 겨를도 없이, 자궁경부암 환자를 대하는 차가운 위로의 말들과 마주해야 했다.


'아이고, 어쩌다 그런 나쁜 병이 생겼어...' 하는 흔한 걱정도 '얼마나 몸을 함부로 굴렸기에 그런 병에 걸렸느냐'라고 변질되어 나를 콕콕 쑤셔대기 바빴다. 마치 멀쩡했던 세포가 변질되어 암세포가 되어버린 것처럼.


'생각의 이상세포'는 수술 날짜를 정하고, 수술 방법을 결정하고, 수술을 받고, 회복하는 모든 과정을 거쳐가며 차근차근 번식해 나갔다.


내가 밝은 모습으로 회복에 임하면 암 환자가 이렇게까지 긍정적인 모습은 처음 본다고 했고, 통증에 아파하면 암 환자는 이럴 때일수록 긍정적인 생각을 해야 빨리 낫는다고 했다. 마치 그들이 나의 아픔을 먼저 겪어보기라도 한 듯이.


나의 모든 생각과 행동 앞에는 '암환자'라는 말이 붙어 다녔다. 물론 내가 자초한 일이니 누구를 탓할 수도 없다.





내 '생각의 암세포'는 멋대로 자기만의 영역을 확장해 나갔다. 나를 걱정해 주는 것도, 예전처럼 대해주는 것도, 그냥 다 마음에 들지 않고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지경이 되고만 것이다.


하루라도 빨리 일터로 복귀하기 위해 재활운동을 하려고 헬스장을 찾았던 어느 날, 함께 일했던 트레이너 선생님을 우연히 마주쳤다. 아프다는 소식을 들었다며, 어디가 아팠는지, 지금은 괜찮은지, 열심히 하던 사람이 한동안 보이지 않아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많이 걱정했다며 안부를 물어왔다.


'네, 그냥 일이 좀 있었어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하면 될 것을, 자궁경부암에 걸려 수술받은 지 이제 세 달이 조금 넘었고, 아직 체력이 예전 같진 않지만 일상생활은 가능해서 재활차 운동을 나왔다고 곧이곧대로 다 이야기해 놓고는, 상대방의 걱정 어린 시선을 마주하자, 별안간 나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으로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의 진심 어린 걱정을 멋대로 곡해하지 않으 읽었던 책에서 이런 구절을 발견했다.


'낙인이 찍힌 개인은 자신의 정체성이 사회적 맥락에서 재정의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낙인이론'은 개인이 사회적 낙인을 통해  정체성을 형성하고, 그 과정에서 행동과 사고에 어떤 변화가 생기는지를 탐구하는 사회심리학적 이론인데,

근본적인 주장은 어떤 특성이나 행동이 개인에게 부여될 경우, 그 개인은 그 특성을 내재화하며, 결국 자신의 정체성의 일부로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청소년 시절 문제가 있던 한 친구가 문제아라는 낙인이 찍히게 되자, 점차 자신이 그런 존재라고 믿게 되어 더 문제적인 행동을 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낙인은 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나아가 사회 전반적인 문제에 깊숙이 침투하게 된다.




스스로에게 ‘암환자’라는 주홍글씨를 새겨 세상에 공표하고 나니, 예상치 못하게 사회적 맥락에서 약자로 규정되는 일이 내 일상이 되었다.


'암 환자'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안 되고, 우울한 생각을 해서도 안되고, 가공된 음식은 피해야 하고, 몸에 무리가 가는 운동도 피해야 하고, 더불어 '자궁경부암' 환자를 대하는 특유의 눈빛과, 말들...


나는 '내가 아픈 것을 아는 사람이 없는 곳'으로 사라지고 싶어졌다. 아니, 아주 오래전부터 나는 나를 옭아매고 있는 모든 기억으로부터, 잊히지 않는 과거로부터, 지긋지긋한 가난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숨고 싶진 은데, 도망치고 싶다.




심리학 적으로 ‘회피(avoidance)'는 불편한 상황을 피하려는 반응이고, ‘도피(escape)'는 이미 직면한 환경에서 벗어나려는 행동을 말한다. 어쩌면 둘 다 현실을 피하는 행위일지도 모르지만, 마음 깊은 곳을 들여다보면 둘의 차이는 분명했다.


숨는다는 것은 외부로부터 몸을 움츠리는 행위다. 나를 둘러싼 상황과 감정을 마주할 자신이 없을 때,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신을 보이지 않는 곳에 감춘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회피적 대처'라고 부른다. 이는 불안과 스트레스에 직면했을 때,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보다는 상황 자체를 외면함으로써 심리적 안정을 찾으려는 방법이다.  


나는 내가 겪은 일들을 감추고 싶은 것이 아니다. 내가 겪은 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것이다. 도망치고 싶은 마음은 무언가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강한 자아의 움직임이다.


이는 '심리적 탈출'로, 자신을 해치는 환경이나 관계, 혹은 압도적인 책임에서 자유로워지려는 시도다. 도망치고 싶은 욕구는 단순한 회피가 아니라, 심리적 생존을 위한 능동적 선택에 가깝다.


이 둘의 차이를 명확히 하고 나니, 그동안 이해할 수 없었던 것들이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땀에 흠뻑 젖을 정도로 늘 무언가에 쫓겨 어딘가로 도망치는 악몽을 반복해서 꿨던 것이나,

꿈에서와 마찬가지로 늘 쫓기는 사람처럼 도망치듯 살았던 자신을 말이다.


나는 '심리적 생존'을 위한 '능동적 선택'을 해왔던 것이다.




‘도망치고 싶다’는 감정은 새로운 공간을 찾고 싶은 내면의 욕구일지도 모른다.


불우했던 어린 시절의 나도, 암 환자도, 트레이너도 아닌, 그저 ‘나’로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을 찾고 싶은 욕구. 더 건강한 환경으로 이동하고 싶은 욕구.


나는 내면의 욕구에 따라 39년간 겪은 일들을 가감 없이 써내려 가며,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하고, 무너지는 자신을 지키기 위한 경계선을 긋는다.


타닥타닥 거리는 키보드 소리에 맞추어 ‘나 자신을 되찾기 위한 몸부림’을 치고 있는 중이다.


도망치고 싶다는 건, 어쩌면 진짜 원하는 삶을 찾아갈 준비가 끝났다는 신호이지 않을까?

 





그래, 지언아 도망 가자.

그게 어디든, 네가 원하면 언제든 좋아.

나는 절대 너를 놓지 않아.



이전 05화 내 불안의 두 번째 이름_존재 불안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