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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불안의 첫 번째 이름_유기 불안

by 챌린지언 Feb 25.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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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때의 일이다.


당시 우리 집은 형편이 어려워 도망치듯 여기저기 떠돌며 이사를 다니던 때였다.


학교에 가려고 집을 나서는 나를 불러 세운 엄마는 수업이 끝나면 몇 시쯤 되느냐고 묻더니, 할 이야기가 있으니  곧장 집으로 오라는 당부를 했다.


엄마 말대로 수업이 끝나자 곧장 돌아온 집 안은 아침과는 전혀 다른 무거운 공기가 낮게 깔려있었다.


현관에 낯선 구두가 가지런히 놓인 것을 보니 손님이 와 계신 듯했다. 자세히 보니 외할머니 신발이다.


현관에 선 채로 빼꼼히 고개를 내밀어 방 안을 살피니 문 틈 사이로 나와 눈이 마주친 할머니가 손으로 방바닥을 서너 번 두드리시며 여기 앉으라는 신호를 하셨고, 옆에는 고개를 푹 떨군 채 앉아 있는 엄마가 보였다.


나는 무언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나?' 되짚어 보며 방으로 들어갔다. 할머니가 가리킨 곳에 조용히 앉아 시선은 방바닥에 고정한 채 한동안 발가락만 꼼지락 거렸다.


가장 먼저 침묵을 깬 건 엄마였다.


"지언아, 부산에 이모할머니 알지? 할머니 언니 말이야. 그분 딸들이 전부 미국에 사는데, 부부가 다 의사래. 부족함 없이 잘 산대."


"그래, 할머니 조카들이 미국에서 그렇게 잘  산단다." 할머니가 말을 덧댔다.


근데 그 이야기를 왜 이렇게 분위기 잡으며 할까? 의아한 눈으로 엄마와 할머니를 번갈아 가며 보았다.


요지는 이러했다. 나의 외할머니의 막내 조카 부부가  미국에서 부족함 없이 삐까뻔쩍 하게 아주 잘 사는데, 부부 사이에 아이가 없어서 고민을 한다는 거였다.


"그래서?"

그들의 고민을 왜 나에게 털어놓지?

나는 어리둥절해 고개를 갸웃거리며 퉁명스럽게 물었다.



엄마는.. 한참 뜸을 들이다가, 무언가 결심한 듯 한숨을 크게 내쉬더니, 금방이라도 피눈물을 쏟을 것 같은 눈으로  나를 응시하며 입술을 한 번 꾹 깨물었다가,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억지로 열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지언아, 너... 거기... 미국 이모네로 입양 갈래?"



"입양...? 내가 왜? 입양은 고아가 가는 거 아니야? 난 엄마 있잖아"


-


엄마와 할머니는 합심하여 내가 미국에 가서 살면 좋은 이유를 차근차근 늘어놓았다.  


전부 다 그럴듯한 이유였지만, 이해할 순 없었다.

나는 풀이 죽은 소리로 혹시 나 때문에 힘드냐고 묻자, 엄마는 손을 세차게 저으며 절대 그렇지 않다고 했다. 지언이 너는 똑똑하고 영리한 아이인데, 여기보단 좋은 환경에서 돈 걱정 없이, 하고  싶은 거 마음껏 하고 지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그런다고,


거기 가면 의사든 변호사든 박사든 뭐든 될 수 있을 거라고. 너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아이라고, 절대 엄마가 힘들어서가 아니라, 부족해서 그런다 했다.


살기 힘들어서 나를 버리는 것만 아니면, 뭐가 됐는 난 다 괜찮았다. 그까짓 입양 가는 것이 뭐 어렵다고.


약수터에서 받아온 물로만 씻겨가며 금이야 옥이야 키우던 하나뿐인 딸내미를 떼어놓는 엄마의 마음은 또 오죽할까 싶어,  더 이상 이유를 묻지 않고 그러겠다고 했다.



"근데 엄마, 그럼 이제 나는 엄마를 엄마라고 못 불러?"


삼대는 모여 앉아 한참을 목놓아 울었다.


-


나는 결국 입양을 가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가지 못했다.


미국에 산다는 의사 이모의 건강이 갑자기 나빠져서 건강상의 문제로 입양 허가(?)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긴 했지만, 당시 중학생이었던 내가 입양을 가기엔 나이도 많았고, 국적도 옮겨야 하고, 친족 간의 입양이라 법적으로 처리해야 하는 절차가 복잡하기도 했다.


엄마는 내게 아쉽지 않냐고 물었다. 나는 당연히 아쉽지 않다고 대답했지만, 엄마는 애꿎은 땅을 툴툴 차며 "우리 딸, 거기 가면 부족함 없이 다 할 수 있었을 텐데..." 하고  말끝을 흐렸다.


나는 정말 괜찮다며, 혹시 엄마가 아쉬워서 그러냐고  조심스레 물으니 조금 더 알아보고 할 걸 괜히 이야기를 꺼내 나에게 상처만 줬다고 속상해했다.


이후 누구도 그 일을 입 밖으로 꺼내놓는 사람이 없었다. 우리 모녀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일상을 살아갔고, 허무하게(?) 끝난 입양사건은 그렇게 조용히 무마되는 듯했다.


내가 성인이 된 다음 딱 한 번, 자고 있던 엄마를 흔들어 깨워서는 왜 나를 버리려고 했냐고 동네가 쩌렁쩌렁 울리도록 악을 쓰며 울부짖던 날이 있긴 했지만, 사실  나는 알고 있었다. 엄마는 단 한순간도 나를 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


암 수술을 받고 나서, 나는 외할머니와 통화도 자주 하고 찾아뵙는 일이 부쩍 많아졌다. 할머니는 예쁜 손녀, 멋진 손녀, 귀한 손녀, 하시며 어화둥둥 꽃가마를 태워 주신다.


어느 날엔 할머니가 "지언아~ 우리 손녀, 할머니가 사랑한다♡" 하셨는데, 그만 눈물이 왈칵 쏟아져 아무 말도 못 하고 꺽꺽 소리 내며 울었다.


할머니는 얘가 갑자기 왜 우냐며, 허둥지둥  엄마에게 전화기를 넘기셨고, 재차 왜 그러냐고 묻는 엄마에게,


입을 삐쭉거리고 혀 짧은 소리로

"나는 이 말을 엄마한테 너무너무 듣고 싶었어! 으앙~" 하고 한참을 아이처럼 펑펑 울었다.


아쉽게도 엄마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듣진 못했지만, 엄마가 살아가는 모든 날이 '나를 향한 사랑의 몸짓'이었다는 걸 곁에서 보고 자랐으니 그것으로 되었다.


-


최근 심리 상담을 받으며  불안의 이름이  '유기불안'이라는 을 알게 되었다. 상담사는 그럴 만한 사건이 있었는지 물었고, 나는 '네, 있어요.' 짧은 대답만 했다.


그리곤 약간의 정적이 흘렀는데, 어쩌면 그 '입양사건'은 나에게 '버림받지 않으려면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는 그릇된 믿음을 심어주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상담사에게는 굳이 '입양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놓지 않았다. 나는 입양을 가지도, 버림받지도 않았고, 그 상황은 누구의 탓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저런 일을 해야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말을 듣는 것이 가장 부담되고 싫었다.)


-


상담사에게조차 털어놓지 않은 이야기를 이렇게 불특정 다수가 보는 공간에 적는 것이 어쩌면 이질적일지도 모른다.


상처뿐인 나의 이야기를 이렇게 하나씩 꺼내놓는 이유는, 과거는 더 이상 현재의 나에게 상처를 줄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확인시켜 주고 싶기 때문이다.


그저 안온하길 빈다.

나도, 이 글을 읽는 당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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