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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을 FLEX 하는 여자

by 챌린지언 Mar 01.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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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궁경부암 수술을 받은 지 4개월이 흘렀다. 1년은 족히 흐른 것 같은데 아직 4개월 밖에 지나지 않았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흐른다고 하지만, 사실은 전혀 공평하지 않다. 멈추고 싶은 아름답고 행복한 시간은 빠르게 지나쳐 버리고, 쏜살같이 흘러야 마땅한 시간은 나무늘보 마냥 도통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병원에서 퇴원 후 거의 매일을 꼼짝 않고 잠만 자며 하루를 보냈다. 적게는 15시간, 많게는 20시간을 잠만 잤는데, 눈을 뜨고 있는 나머지의 시간도 그냥 누워만 있었다. 움직임 이라곤 화장실 갈 때 잠깐 일어서는 것, 밥 먹을 때 잠깐 앉아있는 것이 전부였다.


누워있는 것이 전부였던 나의 하루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한 것은, 턱밑까지 차오른 불안과 우울을 덜어내려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벌써' 8회 차 글을 쓰고 있다니! 글을 쓰면 멈추었던 나의 시간도 제법 빠른 속도로 흐른다.






포유류 중 가장 느린 동물이라는 나무늘보는 평균 시속이 900m 정도로 1분당 15m씩 움직이는데, 이마저도 가다가 체력이 떨어지면 더 느려진단다.


나무늘보는 모든 생활을 나무 위에서 하는데, 움직이는 일이 거의 없이 나무에 매달려 18시간 넘게 잔다고 한다. 그러나 배설만큼은 땅 위에서 하는 독특한 습성 덕분에 용변을 보기 위해 땅으로 내려오는데 그때 가장 많이 움직인다.


느리게 흐르는 시간을 나무늘보에 비유하고 나서 이 친구의 특징이 궁금해 찾아보았는데, 지구상에 나처럼 살아가는 생명체가 또 있다는 사실이 조금은 위안이 되었다.


나무늘보의 특징을 찾다가 또 한 가지 알게 된 신기한 사실은, 물에서는 평소보다 3배 정도 빠른 속도를 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말 급할 때는 일부러 물에 빠지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나는 사실이 매우 흥미로웠다. 나의 시간이 다시 빠르게 흐른다고 느끼게 된 시점이 바로 '우울에 빠져들고 나서'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일부러'에 있다. 수동적으로 잠식당하는 것이 아닌, 능동적으로 빠져든 것이다.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암을 이겨내는 당신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책을 날마다 읽었다. 책을 읽으며 훌쩍 거리는 모습을 본 간호사와 조무사님들은 긍정적인 생각을 해야 빨리 낫는데 왜 우울하게 이런 책을 읽고 있느냐고 타박 아닌 타박을 했다. 내 생각은 전혀 달랐다. 슬프고 우울한 마음일수록 쌓아두지 말고 밖으로 드러내 소진시켜야 한다. 나에겐 그러할 권리가 있다. 


사람들은 왜, 행복하고 기쁜 시간들은 마치 영원할 것처럼 흥청망청 다 써버리곤 하면서, 슬프고 우울한 시간은 애써 삼키며 마음 한편에 차곡차곡 쌓아두는 것일까? 마음껏 슬퍼하면 안 되는가? 마음껏 우울하면 안 되는가? 왜 슬픔은 낭비하면 안 되는가?


나는 더 이상 슬픔을 모으지 않고 흥청거리며 쓰기로 작정했다. 열 살부터 차곡차곡 모아두었던 터라, 복리효과로 눈덩이처럼 불어나 평생을 쓰고도 남을 만큼의 어마어마한 양의 슬픔이 되어버렸지만, 총 나가라 활 나가라 마음껏 쓰다 보면 차고 넘치는 이 슬픔도 언젠가는 끝이 나겠지.





 

심리학자 퀴블러로스의 심리(마음) 변화 곡선심리학자 퀴블러로스의 심리(마음) 변화 곡선


심리학자 퀴블러로스는 사람의 심리 변화를 몇 가지 단계로 나누어 정의했다. 어떠한 사건으로 인해 심리적인 충격을 받았을 때 보편적으로 겪는 심리의 변화를 곡선으로 나타낸 것인데, '충격 < 부정 < 좌절 < 우울 < 실험 < 결정 < 통합'의 과정을 거친다는 것이다.


사람의 성향이나 처한 상황마다 그래프 곡선을 그리는 높고 낮음은 다르겠지만, 사람이라면 누구나 충격을 받으면 현실을 부정하고, 변화된 상황에 좌절하고, 또한 깊은 우울에 빠지기도 하면서 결국 자신만의 해결책을 찾아 나은 내일로 나아갈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그래프를 나는 사랑한다.


그러니 좌절감을 느끼고 우울한 것은 내가 이상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지극히 정상이라는 것이다.

슬픈 일에 슬퍼할 줄 알고, 아픈 것을 아프다고 말하고, 우울한 '감정'을 느끼고 그것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건, 어쩌면 아주 건강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가졌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지금 내 감정의 위치가 어디에 있든 다 괜찮다.

너무나 마땅히 거쳐야 하는 과정을 겪고 있는 것이니.


사는 것이 힘이 들어도, 잠시 멈춘 것 같아도, 괜찮지 않아도, 전부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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