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무드 Sep 21. 2022

바르셀로나에서 애 낳기

출산기록 5

동이 터오고 네게 젖을 물리고 품에 안은 채로 깜빡 잠이 들었다. 혹시 내가 잠들까봐 남편이 내 침대를 쿠션으로 감싸둬서 혹시 팔에 힘이 풀려도 네가 다칠 염려는 없었다. 얼마나 잤을까 누군가가 내 팔을 가만히 쓰다듬는 것이 느껴져서 깼다. 몬세랏 선생님이었다. 당직이 끝나고 퇴근한다고, 좀 어떻냐고 묻길래 괜찮다고 했다. 비몽사몽으로 고맙다고 덕분에 잘 할 수 있었다고 하고는 또 다시 잠이 들었다. 다시 또 누가 내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어서 깼다. 엘레나 산파 선생님이었다. 오늘 쉬는날인데 나와 아기가 잘 있는지 보러 왔다고, 좀 어떻냐고 물었다. 아기에게 젖 물리는 법과 몸을 닦아주는 법, 안아주는 법 등등을 알려주고 선생님네 다섯손주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두 여자의 따듯한 마음이 전해졌다. 내가 뭘 잘했다고 이렇게 다정한 사람들과 함께 큰 일을 치뤘나. 이것도 다 네가 갖고 온 복이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져나올 것 같은 동시에 그저 피곤하고 지치기만 하고 이 모든 것이 버겁기도 하고 그랬다. 출산한지 12시간이 갓 넘었을 뿐인데, 모든 의료진이 나를 ‘mamá 마마’라고 불렀다. 어색했다. 옆에서 젖먹고 잠들고 울고 응가누고 쉬야누는 너는 더 더 더 어색했다. 이 세상 것 같지 않았다.


아침식사가 왔다. 채소스프, 닭가슴살구이, 빵과 버터, 구운 당근과 감자 아스파라거스, 요거트. 평소라면 혼자 먹기에 약간 많은 양이었지만 엄청난 속도로 먹어치웠다. 엄청나게 허기가 졌다. 먹고 나서도 여전히 배가 고파서 혹시 몰라 집에서 출산가방에 넣어둔 쿠키를 꺼내 먹었다. 그러고 나서도 배가 고파서 집에 있는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밥을 좀 해다 가져다 달라고 했다. 엄마 아빠는 미역국과 비빔밥을 해서 병원 앞으로 왔다. 코로나때문에 아무 면회도 허용되지 않고, 산모와 아기는 입원실 밖으로 나갈 수 없어서 남편이 나가서 받아왔다. 엄마가 보고싶었다. 나가서 아기도 보여주고 엄마에게 안겨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입원실은 2층이었다. 방에는 작은 발코니가 있었지만 안전상 유리문이 잠겨있어서 나갈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창문에 아기를 안고 다가가서 멀리서나마 보여줬다. 멀리서라도 엄마아빠 얼굴을 보니 좋았다. 마음이 좀 놓이는 것 같았다. 엄마 얼굴은 자식을 안심시키는 부적같은 것이다. 손을 흔들고 아기를 보여주고 손으로 동그라미 액스 해가며 소통하다가, 아.. 핸드폰 두고 이개 뭔짓인가 싶어 그냥 통화했다.




아침먹고 비빔밥먹고 미역국먹고 점심먹었다. 점심도 고단백 고칼로리로 나왔다. 버섯스프, 소고기 스테이크, 으깬 감자와 구운 채소, 엄청 맛있었다. 먹어도 먹어도 더 먹고 싶었다. 이런 허기는 처음 느껴보는 것이었다. 배고픔이 아니라 굶주림 같았고 맛이 아니라 양이 중요했다. 생존 본능으로 느끼는 허기같았다. 먹어야 산다, 같은 그런 것이었다.



간호팀이 왔다. 수간호사 선생님이 내가 젖을 잘 물리는지 봐주셨다. 가슴이 점점 단단해지고 있었는데 많이 불편했다. 선생님이 가슴 마사지를 해주고 뭉친 부분을 지긋이 누르며 수유를 하라고 가르쳐주셨다. 신기했다. 내 몸에서 애가 나온 것만큼이나 젖이 나오는 것은 신기한 일이었다. 또 그걸 이 애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알아서 먹는다는 것은 더욱 신기했다. 나는 어떻게 주는지 배워야 했는데, 너는 어떻게 먹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오후에는 다시 출근한(의사는 정말 너무 바쁘고 고된 직업이다. 내가 병원애 머문 4박5일동안 매일 아침저녁으로 이 사람을 봤다. 집에 언제가냐고, 언제 쉬냐고 물으면 맨날 ‘내일’이라고 했다…) 몬세랏 선생님과 다시 초음파도 보고 꼬맨 곳도 확인하고 그랬다.


몸이 너무 피곤했다. 푹 자고 싶었다. 자꾸만 슬퍼지려고 했다. 왜 나를 자게 두지 않는건지 화도 나고, 갑자기 막 한국은 조리원가면 애를 데려가서 산모가 푹 잔다고 여기는 여성 인권이 어쩌구 저쩌구하면서 투덜대고 욕했다. 다들 아무 말도 없었다. 남편만 간간히 편을 들어주며 공감해 주었지만, 달라지는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냥 거기는 그렇고 여기는 이런 것이었다.


탄생직후 모자동실 100% 단 1분도 아이를 부모에게서 떼놓지 않는 시스템 아기 검진도 방으로 와서 하고 채혈도 방으로 와서 하는 시스템, 아기는 엄마와 함께 있는 것이 너무 당연하고 내가 애데려가라고 나 자야된다고 말하는 것이 미친 소리같이 들리는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맞는 말이다. 이제 세상에 갓 나온 아기에게 혼자 떨어져 저리 가서 자라고 하는 것은 가혹하게 느껴진다. 또 이곳의 시스템은 모유 수유를 강제로(?) 학습시킨다. 자연 분만은 생후 3-5일동안, 제왕 절개의 경우 5-7일 동안 머무는 병원에서, 간호진이 매 두 시간마다 들어와 젖을 물리는 것을 도와주는 것은 큰 도움이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하면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모유수유를 충분히 배우고 나갈 수 있게 해주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너무 버거운 일이었다.  몸이 바스라지는  같은데 계속해서 들어와서 젖먹이자고 그러고, 아기가 빠는거 지켜보면서  가슴 꾹꾹 누르고, 트림시키고 재우고 나도  자자 싶으면  들어와서 혈압재고 젖먹이자고 그러고…. 힘들었다. 나를 도와주려고 하는 것인데 괴롭히는  같았다.  시간을 겨우 자고  배고파서 우는 아기를 탓할  없어서 애먼 간호 탓했다. 내가 양껏   없는 것이 아기 때문이 아니라  망할 자연주의 모자동실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나는 아이를 낳았다.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  만큼 출산의 경험은 다양할 것이다. 엄마가 되는 여자는 모두 각자의 출산에 대한 기억이 있을 것이고, 결코 잊지 못할 인생의 중요한 순간일테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아기를 키운지 다섯 달이 되어가는 지금 나의 출산의 장면이 조금, 아주 조금 연해진 것을 느낀다. 장면은 생생한데 냄새는  기억나지 않는다던가, 소리가 아직도 들리는  같으면서도 정확히 그게 언제였는지,  많은 기억들의 순서가 헷갈린다.


그래서  연해지다 바래지기 전에 글을 써두기로 했다. 훗날 내 아이와 나에게 주는 선물이다.




이전 04화 바르셀로나에서 애 낳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