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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서도 안 가본 빨래방, 치앙마이에서 '만렙' 찍다.

유심 먹통 사태와 코인 세탁소, 비로소 시작된 진짜 현지 생활.

by 나들레



빠이로 떠나기 전, 2시간이라는

긴 대기 시간을 견디며

데이터를 빵빵하게 충전해 뒀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충전 5일째 되던 날 청천벽력 같은 문자가 날아왔다. 알 수 없는 절차가 적힌 영어 문자와 함께 데이터가 거짓말처럼 먹통이 되어버린 것이다.


외국인 신분이라 문제를 해결하려면 공식 대리점(AIS)을 방문해야 했다. 하지만 시골 마을 빠이에는 공식 대리점이 없었다. 숙소 사장님 남편분이 핸드폰 개통 가게라도 데려다주겠다고 하셨지만, 복잡한 절차가 걱정되어 포기했다.


결국 나는 빠이에 머무는 7일 중 3일은 와이파이를 찾아 헤매거나, 아는 길만 다니는 등 본의 아니게 '강제 디지털 디톡스'를 해야 했다.





치앙마이로 돌아오자마자 숙소보다 먼저 찾은 곳은 터미널과 가장 가깝고 유심칩을 구매했던 '센트럴 페스티벌 AIS' 매장이었다. 번호표를 뽑고 기다리다가 직원을 마주했는데, 놀랍게도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어? 저번에 오시지 않았어요? 한국 분 맞으시죠?"


수많은 현지인과 외국인이 오가는 곳인데 나를 기억해 주다니. 뜻밖의 관심에 짜증 났던 마음이 눈 녹듯 사라졌다.


직원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내 여권과 얼굴을 스캔하더니 뚝딱 해결해 주었다.


"와! 드디어 디지털 디톡스에서 해방이다!."


하지만 안도감은 딱 이틀뿐이었다. 님만해민 쪽에 머물고 있을 때, 악몽처럼 그 문자가 다시 날아왔고, 데이터는 또 끊겼다. 택시 타고 시내 건너편에 있는 센트럴 페스티벌까지 다시 가야 하나 고민하다가, 근처 마야몰에 있는 AIS 매장으로 향했다.


절차는 똑같았다. 여권 스캔, 그리고 얼굴 촬영. 5년 전엔 겪어보지 못한 번거로움에 스트레스 수치가 치솟았다.





"이틀 전에도 똑같이 인증했는데 왜 또 이러는 거죠?"

직원에게 묻자 돌아오는 대답은 허무했다.


"정부 정책이라 의무 사항입니다. 이 문자가 오면 무조건 대리점에 와서 본인 확인을 해야만 다시 사용할 수 있어요."


"만약, 문자가 또 오면요?"


"그때마다 다시 오셔야 해요."

직원은 무성의하게 답했다.


편리함을 위해 구매한 유심이 오히려 여행의 발목을 잡다니. 다음에도 AIS를 선택해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되는 순간이었다. 천만다행으로 그날의 방문 이후, 악몽 같은 문자는 더 이상 날아오지 않았다.


정작 유심 오류보다 내 마음을 무겁게 한 건, 마야 몰 직원의 태도였다. 친절하고 상냥했던 센트럴 페스티벌 직원들과 달리, 이곳의 공기는 사뭇 차가웠다. 데이터가 끊겨 답답한 여행자의 마음을 헤아리기보다는, 사무적인 눈빛과 기계적인 답변만이 돌아왔다. 마치 '시스템이 그러니 어쩔 수 없다'라는 무언의 선 긋기처럼 느껴져 덩달아 말문이 막혔다.


물론 외국인 전용 창구가 많아 대기 시간이 짧다는 효율성은 인정한다. 그렇다 해도 5년 전의 좋았던 기억, 그리고 불과 며칠 전 겪은 센트럴 직원의 따뜻한 배려와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밀려드는 관광객에 지친 탓일까, 아니면 초심을 잃은 걸까. 치앙마이를 좋아하는 여행자로서, 그 극명한 온도 차가 못내 씁쓸했다.



[ 치앙마이 유심(AIS) 이용 TIP ]


보안 강화 : 최근 정부 정책으로 유심 사용 중 불시에 '본인 확인(얼굴 인식)'을 요구하며 데이터가 차단될 수 있습니다. (문자 수신 시 대리점 방문 필수)





유심 전쟁을 치르고 나니, 이번엔 밀린 빨래가 눈에 들어왔다.


빠이에서는 손빨래로도 충분히 해결되었기에 세탁소를 찾는 일이 없었지만, 그래도 치앙마이로 돌아오니 미뤄둔 큰 빨랫감들이 제법 쌓인 상태였다. 일주일 치 빨랫감을 어깨에 이고 지고 숙소 근처 싼티탐(Santitham)에 있는 코인 세탁소를 찾았다. 평점 좋은 곳을 골라, 낯선 싼티탐 동네 구경도 할 겸 나선 길이었다.





아침을 먹고 도착했는데, "와우!" 이른 아침부터 세탁소는 문전성시였다. 빈 세탁기와 건조기가 거의 없을 정도였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30분은 족히 대기해야 했을 것이다. 5년 전 이용했던 한산한 세탁소와는 딴판인 풍경에, 이곳이 왜 '핫플레이스'인지 눈으로 실감했다.


한국에서는 한 번도 코인 세탁소를 이용해 본 적이 없지만, 치앙마이 경력직(?)답게 이용은 낯설지 않았다. 게다가 이곳은 24시간 무인 매장임에도, 상냥한 관리인 아주머니가 상주하고 계셔서 굳이 요청하지 않아도 척척 도와주셨다. 덕분에 이용이 한결 수월했다.





편의 시설도 훌륭했다. 세제와 섬유유연제 자판기부터 동전 교환기까지, 필요한 모든 것이 갖춰져 있었다. 가격도 합리적인 데다 편의점에서도 파는 유명 브랜드 제품이라 의심 없이 사용할 수 있었다.


재미있는 건 태국의 '세탁 대행' 문화였다. 보통 코인 세탁소는 본인이 직접 돌리는 시스템인데, 여기선 빨랫감을 맡기고 가면 아주머니가 세탁부터 건조까지 대신해서 바구니에 차곡차곡 곱게 개어두신다. 무인 세탁소와 유인 서비스가 공존하는, 독특하고 편리한 풍경이었다.





결제는 QR 스캔으로 간편하게 해결했다. 당시 QR 결제가 잘 안되던 시기였음에도 이곳 기계는 막힘없이 작동해, 짤랑거리는 동전을 하나씩 세어볼 필요가 없었다.





세탁 코스나 건조 코스를 고를 때도 벽면에 붙은 커다란 설명서가 구세주였다. 꼬불꼬불한 태국어와 영어 사이에서, 직관적인 픽토그램(그림) 덕분에 내 옷감에 딱 맞는 코스를 고민 없이 선택할 수 있었다. 그 덕에 빨랫감 손상 없이 깨끗하게 세탁할 수 있었다.


기분 좋았던 첫 방문 이후로도 두어 번 더 찾았다. 갈 때마다 아주머니와 반갑게 눈인사를 나누고, 기계와도 제법 친해졌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빨래를 돌리고 나면, 갓 구운 빵처럼 보송보송해진 옷들이 나를 반겼다.



한국에서도 안 해본 코인 세탁소 이용,
타국에서 '만렙'을 찍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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