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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맹드 Nov 12. 2024

4. 비가 오면 우산이 되어줄게

어리석은 결혼은 하기 싫었다.

효율적이고 논리적인 것을 좋아하는 나는,

"아프다"라고 말했을 때

"어떡해" 놀라는 사람보다는

재깍 "약 줄까?"라고 말하는 사람이

했다.


속상한 일이 있어

소상히 설명하는 것도 귀찮을뿐더러

이 세상에 속상한 사람은 나 하나면 족하지

두 명이나 만들 필요는 없었다.


그런 나에게,

T의 사랑 방식은 신세계였다.


'부모만큼
나를 안타깝고 애틋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구나'


선불로 이루어지는 결제방식처럼

그는 늘 먼저 잘해주었다.


내가 그를 떠보거나

믿음을 보류하는 상황에서도

당황하거나 언짢아하지 않고(혹은 내색하지 않고)

흔들림 없는 눈빛으

 의사를 존해 주었다.


자존심일랑

저 멀리 독도 해저에 두고 온 사람처럼

사소한 것에 얼굴을 붉히지 않았고

애매한 것에 의미 부여하지 않았다.


그의 일관성 있는 존중의 태도는

나를 나답게 행동할 수 있도록

자유롭게 만들어 주었다.


그가 수시로 쓰는 특수문자 ^^는

처음엔 담스럽게 다가왔지만

오프라인에서의 언행일치했기에

시간이 지날수록 정적으로 느껴졌다.


커다랗고 살집 두둑한 얼굴에 퍼

그의 웃음과 입꼬리를 상상하게 만드는

40대 아재 이모티콘이었다.




우리가 특별하고 고유한 관계로 나아갔다는

척도는

나의 고질적이고 구제불능적인 단점까지도

수용했느냐였다.


그걸 모르고선

내 사람이 되었다 할 수 없었다.


파도가 바다의 일인 것처럼,
그는 나를 존중했고
통째로 받아들였다.


누구에게나 있는 크고 작은 '가족사(史)'도

구들장 같은 그의 마음

찬물을 끼얹는 못했다.

붉은 열을 간직한 숯처럼,
오랜 시간 데워진 온돌방처럼,
그는 늘 그랬다.

변덕스러운 나의 마음 날씨에
개의치 않고
언제나 거기 있는 태양처럼,
온기있는 존재가 되어주었다.


나의 학력과 외모를

본인이 가진 재산과 명성에 비교하여

과연 '등가교환이 되는 거래일지' 묻던

남자 A.


'과연 이 여자는 한 달 얼마의 생활비

노모 대신 자신의 뒷바라지를 해줄 수 있을지'

여자의 커리어을 무시하고

내게 앞치마를 씌우려던

남자 B.


T는 나와의 연애

거래 면접자가 아닌 

그저 숙명처럼 받아들인 사람 같았다.


그러다 어느 날,

'이 온기를 평생 내 곁에 둘 수 있을까?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예감이

나를 관통했다.


만난 지 4개월 되던

어느 항구에서였다.

아빠와 처음 대면하던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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