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리에 <내 집짓기>
아예 집을 짓기로 마음을 굳힌 나는 새로운 집을 보러 다니는 것을 멈추고 집을 지을 땅을 찾기 시작했다. 땅을 보러 다니면서 몇 가지 기준을 정하고 이를 토대로 땅을 찾았는데 물론 이 모든 조건에 100%로 부합하는 땅은 찾기 어려울 거라는 생각이 들어 우선순위를 정했다.
사실 이 순위는 처음부터 뿅 하고 나온 것은 아니었다. 지금에서야 이렇게 한눈에 정리가 되었지만 처음에는 이런 기준 없이 무작정 다니기만 했다. -땅을 보러 다니는 건 처음이라!
그러다 보니 어떤 땅을 골라야 하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주변 로컬 친구들이 많은 조언을 해 주었지만 모두가 말이 조금씩 달랐기에 무턱대고 그 말들을 믿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좋고 나쁨,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내가 스스로 알아야 했다.
각종 커뮤니티, 인도네시아 뉴스, 구글에서 한국어로, 인니어로, 영어로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땅과 건축에 관한 몇 년간의 글들을 찾아보고 정독했다. 다양한 국적의, 다양한 사람들이 겪은 시행착오들을 바탕으로 내가 주의해야 할 것들을 생각해 보았고 새로운 정보를 알게 되면 단순히 믿기보다는 친구들에게, 관련 전문가에게 묻고 구글에, 커뮤니티에 모든 정보를 교차 검색해서 확인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번역기 있는 세상에 살아서 가능했던 일!
그렇게 공부를 하고 주변에서 하는 이야기들도 주어 담으며 현장을 보러 다녔다. 그러면서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들을 나름대로 정리했다. 이 이외도 세세하게 많은 것을 따져보아야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아래 열 가지 기준을 가지고 땅을 평가했던 것 같다.
1. 서류상으로 집을 지을 수 있는 곳 일 것
발리에는 한국의 그린존과 비슷한 개념이 있다. 모든 땅에 집을 지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2. 상습 침수 지역이 아닐 것
3. 30년 이상 리스가 가능하며 가격이 내 예산 안 일 것
4. 땅 주인이 발리 주민 일 것 (같은 동네 주민이면 더 좋음)
지역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만 발리는 마을 간의 유대가 강한 편이라 혹시 마을과 문제가 생기거나 이웃의 협조를 요청해야 할 때 땅 주인이 이곳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라면 문제해결이 훨씬 수월 할 수 있다. (물론 아닌 사람도 있다)
5. 진입로가 공도이고 차가 들어갈 수 있어야 할 것
땅 진입로가 다른 사람 땅 일수도 있으니 계약하고자 하는 땅의 진입로는 확실히 확인해야 한다.
6. 땅 주변이 비어있는 곳 혹은 공사 중인 곳이 아닐 것
땅 주변이 지금 비어 있다고 해서 영원히 비어 있는 땅은 아니다. 내 집 옆에 무슨 건물이 어떻게 들어올지 모르니 가능하면 이미 건물들이 들어와 있는 땅을 고르는 게 좋겠다.
7. 주변에 전기가 인입되어 있을 것
발리에서 전기는 한국처럼 공공 서비스가 아니다. 주변에 인입되어 있는 전기가 아예 없는 땅이라면 내가 직접 전봇대를 세워 인입해야 하고 절차가 번거롭다.
8. 주변에 밤늦게까지 운영하는 바, 유흥시설이 없을 것 / 혐오 시설이 없을 것
9. 이웃에 특별히 몰려다니는 사나운 개가 없는 곳
10. 서핑을 해야 하므로 바다와 너무 멀리 떨어지지 않을 것
이렇게 나는 나만의 기준을 세우고 나의 라이프 스타일을 고려해 집을 지을 땅을 찾아 골목, 골목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다행인 거는 이미 발리에 일 년 가까이 살며 이곳저곳을 경험해 봐서 인지 내가 원하는 곳을 특정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처음에는 한국의 부동산과 같은 에이전시의 도움을 받았다. 사실 계약이 목적이라기보다는 내가 원하는 지역의 대략적인 시세를 알고 싶어서였다. 에이전시는 내가 선택한 지역의 다양한 가격대의 땅들을 소개해 줬는데 몇몇 땅은 이 지역 시세에 비해 굉장히 저렴했다. 그들은 웃으며 팬데믹이라 좋은 가격에 나왔다고 이야기했지만 함께 한 발리 친구가 나중에 이야기해 준 바에 따르면 내가 본 땅 중 저렴한 땅은 시신을 태우는 곳과 가깝거나 장례식을 위한 종교 활동이 많은 사원과 가까운 땅이라며 발리 사람이라면 절대 사지 않을 땅이라고 했다. 외국인인 나도 이런 땅은 껄끄러웠다. 에이전시를 통해 대략적인 시세와 정보를 얻은 나는 실제 계약은 땅 주인과 직거래로 해야지 싶었다.
발리에 살면서 동네 토박이 친구들을 많이 사귀어 놓은 터라 친구들을 통해서도 여러 땅들을 볼 수 있었다. 게다가 팬데믹 상황이 1년 이상 지속되면서 관관업이 주 수입원인 발리 사람들이 생계를 위해서 땅을 팔거나 장기 리스를 하는 경우가 많아 매물이 많은 편이었다. 그렇게 나는 꽤 오랜 시간을 땅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어느 정도 되니 이제는 구글맵을 보지 않아도 웬만한 골목길의 이름 정도는 다 외울 정도였다. 마을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다 보니 여기저기 땅을 보러 오라는 연락도 알음알음 많이 받았다. 하지만 여전히 내 마음에 쏙 드는 곳은 나타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