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다의 첫 소설『대만졸업』은 개인적 경험을 바탕으로 한 창작 소설입니다.
현실의 인물, 사건과 유사하더라도 이는 우연의 일치입니다.
일부 인물 및 장소는 서사의 흐름상 가명 또는 허구적 설정을 사용하였습니다.
20XX년 2월 27일
한국은 너무나 추웠는데 도착한 대만 타오위안(桃園)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후덥지근했다. 창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고, 공항에서 목적지를 향할 버스를 기다리는데 한국에서는 느끼지 못 한 축축한 습도에 또 한 번 놀랐다. 만 19세 이지안(李知安) 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족과 친구가 아무도 없는 대만에 홀로 서있다. 어쩌다 인생 처음 여권을 만들고, 연고도 없는 이 섬나라까지 오게 된 걸까.
간단히 말하면 수능을 실패했으니까.
그녀에겐 세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점수에 맞춰 대학을 가거나, 재수하거나, 아니면 해외 유학. 그녀는 망설임 없이, 마지막 방안을 택했다. 이미 한국에서 살고 있는 가족 간의 신뢰는 서로 무너진 지 오래였다. 가족 간에 일어나지 말아야 할 불미스러운 일로 인해 가족과 함께 앞으로 산다는 것은 불가능했고, 가정이 무너졌기에 한국은 더 이상 그녀에게 안전한 장소가 아니었다. 그래서 제3국 어디든 상관없었다. 그렇게 선택된 곳이 대만이었다.
미리 준비한, 꾸깃꾸깃 접힌 종이에 적힌 “Where can I take the bus? (어디서 버스를 타나요?)” 같은 간단한 영어 문장을 읊조리며 친절하게 안내를 받아 드디어 공항버스를 탈 수 있게 되었다. 이미 새벽부터 너무나 지쳐있었다. 긴장감에 다리가 풀려 멍하니 자리에 앉았다.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목적지를 향해, 낯선 나라의 공기 속에서 천천히 무너지고 있었다.그렇다고 기대감이 가득하여 마음이 충만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공허했을 뿐이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명문 학군지에서 보기 좋게 실패했다. 이제 더 이상 그 학원 사거리를 성지 순례하듯, 입시 성공이라는 공통된 목표를 품고 무거운 가방을 들고 돌아다니지 않아도 되었다. 사당오락(四當五落)이라는 통념 아래, 불규칙한 수면 시간도, 배가 고파도 참고, 저렴한 삼각김밥이나 시리얼로 대충 허기를 채우며 시간을 아껴야 했던 날들도 이제는 끝났다. 대망의 수능 시험을 끝낸 뒤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남은 것은 개근상과 졸업장, 그리고 처참한 12년의 입시 결과뿐이었다. 동시에 '성인'이라는 자격과 함께 ‘자유’도 얻게 되었지만, 이지안은 아무런 소속도 없이, 학생도 직장인도 아닌, 공중에 붕 뜬 상태가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도망치는 중이었다.
조국으로부터, 가족들로부터, 저 멀리 도망치고 있었다. 문득 정신을 차리니, 이제 그녀가 공부하고 살게 될 대만의 한 유명 대학에 도착해 있었다. 이제 이곳에서 기숙사 수속을 밟고, 어학당을 등록하면 될 일이었다.
말 한마디 못하는 이 한국인 유학생을 위해, 학교 측에서는 미리 대만인 학생을 배정해두었고, 그녀는 안내를 따라 필요한 물품들을 사고, 기숙사도 무사히 배정받을 수 있었다.
걱정했던 것에 비해 수월하게 짐을 풀었지만, 후덥지근한 날씨와는 반대로 기숙사 내부는 무척 추웠다. 곧 졸업을 앞둔 대만 학생들과 함께 4인실 기숙사에 들어가게 되었고, 인사를 건네고 싶었지만, 중국어도 영어도 능숙하지 못한 그녀는 어색하게 손을 흔드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날 밤, 잠이 잘 오질 않았다. 이미 새벽부터 지금 저녁까지, 낯선 외국에서 이렇게 잠을 청하고 있는 스스로가 너무나도 낯설게 느껴졌다. 어제까지는 한국에 있었지만, 오늘부터는 이곳에서 살아야 한다는 현실.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을 홀로 걷고 있는 듯한 기분이 밀려왔다. 그제야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리가 새어 나가면 자고 있는 다른 학생들에게 피해가 될까 봐, 필사적으로 두 손으로 입을 막은 채 울음을 꾹 참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새,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알람 시계를 맞추지도 않았는데 눈이 저절로 떠졌다. 아마도 오랜 수험생활 끝에 몸이 자연스럽게 정해진 기상 시간을 기억하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간단히 씻고 학교 주변에서 아침을 먹으려 했지만, 당연한 이야기지만 메뉴가 전부 한자로 되어 있어 당황스러웠다.
가게 앞에는 대만 사람들이 샌드위치나 계란 부침개 같은 걸 먹고 있는걸 보고 그녀는 손짓과 발짓을 써가며, 앞사람이 먹고 있는 그것과 비슷한 것을 주문하고 싶다고 가게 주인에게 표현했다. 음식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다시 입을 향해 손을 옮기는 방식이었다. 학교에는 이미 외국인 유학생들이 많았기에, 가게 주인은 그녀의 행동에 익숙한 듯한 표정으로 오케이 사인을 보내고는 주문한 음식을 만들어주었다. 생전 처음 해보는 손짓과 발짓에 그녀는 부끄럽기도 했고, 앞으로 과연 이곳에 잘 적응할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 오물오물 샌드위치와 미숫가루 같은 음식을 먹으며 학교 행정 건물로 향했다.
이제 어학당 등록을 위해 3개월 치 학비를 내야 했다. 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려는 찰나, 급하게 배운 영어 단어 “Wait! (기다려!)” 그녀는 외쳤고, 가까스로 엘리베이터에 탈 수 있었다. 그 안에는 그녀와 같은 외국인 남학생이 타고 있었다. 머리카락은 새까맣고 길었으며, 뿔테 안경을 쓰고 있었다. 빨간색과 검정 체크무늬 난방에, 주머니가 많은 짙은 카키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아... 이 사람, 일본 사람이구나.
예전에 학교에서 친구들과 쉬는 시간에서 본 일본 만화책에서 본 듯한 그 스타일이었다. 누가 봐도 일본인이 분명해 보였다. 기다려 준 그에게 그녀는 “땡큐”라고 말하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서둘러 행정실로 향했지만,
문은 잠겨 있었다. 당황한 건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엘리베이터에서 같이 내린 일본인도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마침 지나가던 대만 학생에게 문을 가리키며, 왜 업무를 하지 않는지 손짓과 발짓으로 물었다. 대만 학생은 외국인도 알아들을 수 있도록 짧게 설명했다.
"Taiwan National Holiday."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2월 28일은 대만의 아픈 역사가 깃든 공휴일이었다. 이 모든 우연들이 겹쳐, 그녀는 처음부터 운명적으로 이곳에 오게 된 기분이 들었다. 날씨는 여전히 덥고, 사방은 말이 통하지 않아 답답함이 몰려왔다. 아침에 갔던 가게에 다시 들러, 메뉴가 적힌 종이를 한 장 가져가도 되는지 물었다. 주인은 흔쾌히 허락했고, 그녀는 기숙사에 돌아와 전자사전을 꺼내 한자들을 하나씩 검색해 보기 시작했다.
이건 샌드위치(三明治).. 이건 주먹밥(飯糰)..
하나하나 단어와 한자를 익혀가며, 어색한 발음으로 따라 해보았다. 내일부터는 밥이라도 맛있게 먹고 싶었다.
앞으로 그녀의 인생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이미 한국 사회의 주류에서 벗어났다는 생각이 들면서 심한 자괴감과 우울감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터널을 홀로 걷는 기분에 사로잡혔고, 팔다리가 찌릿찌릿 저려오는 감각을 느껴야만 했다. 한국을 벗어나면 막상 홀가분할 줄 알았다. 하지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가족과의 관계도 해결되지 않은 채, 그저 무작정 외국으로 도망치듯 떠나온 그녀에게 어울리는 타이틀은 "도피성 유학생"이었다.
입시에만 갇혀 있다가 말도 통하지 않는 외국에 나와보니 세상은 또다시 혼란스럽기만 했다. 당시 한국 사회에는 ‘헬조선’이라는 단어가 유행처럼 퍼지고 있었고, 젊은이들은 하나둘, 한국을 벗어날 방법을 찾고 있었다.
일본에서는 그 해, 3.11 동일본대지진이 일어났고, 대만 미디어는 하루 종일 그 소식을 전했다. 설상가상으로 원전 사고까지 겹쳐, 일본은 방사능 공포에 휩싸였다. 그리고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대만의 젊은이들 또한 이 섬을 '귀신섬(鬼島)'이라 부르며 중국이나 제3국으로 나가고 싶어 했다.
세상 어디든, 청춘들은 모두 제자리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이 시대의 모든 청춘이 각자의 방식으로 혼란의 시기를 통과하고 있다는 걸 그녀는 아직 몰랐다. 이제 막, 대만이라는 섬에 도착한 이지안에게 그런 진실은 너무 멀고, 너무 조용한 것들이었다.
그렇게 대만에서의 삶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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