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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대만졸업 02화

2. 그 일본 남자애

by 이진다


이진다의 첫 소설『대만졸업』은 개인적 경험을 바탕으로 한 창작 소설입니다.

현실의 인물, 사건과 유사하더라도 이는 우연의 일치입니다.

일부 인물 및 장소는 서사의 흐름상 가명 또는 허구적 설정을 사용하였습니다.



도착한 지 며칠이 지나서야, 어학당에 정식 등록을 할 수 있었다. 한 학기 3개월 분 학비는 한국 돈으로 약 120만 원이 조금 안 되는 금액이었다. 그녀는 이렇게 큰돈을 그것도 외국 통화로 직접 만져본 적이 없었다.

파란 바탕에 아이들이 지구본을 들여다보고 있는 그림. 생전 처음 보는 대만 지폐였다. 빳빳한 감촉이 생경했고, 지갑에 넣기 전까지 수차례 확인하며 혹시라도 잃어버릴까 긴장한 채 수납을 마쳤다. 등록을 마치자, 며칠 뒤에 레벨 테스트를 본다는 안내가 이어졌다.


며칠 뒤, 어학당에는 레벨 테스트를 치르기 위해 세계 각국에서 온 외국인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그녀는 처음 보는 광경에 적잖이 놀랐다. 얼굴도 서로 다른 백인, 흑인, 동남아, 그리고 그녀와 익숙한 동아시아인들 속에서 외모는 비슷해도 아시아인들끼리는 서로를 구분할 수 있었다.

잠시 후, 어학당 선생님이 등장해 영어와 중국어로 시험 설명을 해주었고 학생들은 곧 시험장으로 이동했다. 시험은 듣기, 읽기, 쓰기, 말하기, 총 4 영역이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모두 중국어로 치러야 했다. 시험을 치르는 그녀 옆엔 며칠 전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쳤던 일본인 남학생이 앉아 있었다. 그녀는 그를 알아보았지만 굳이 아는 척을 할 필요는 없었다. 그녀는 말없이 시험지에 집중했다. 비록 레벨테스트의 내용 대부분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녀는 자신이 아는 한자들을 최대한 기억하며 적어 내려갔다. 그리고 한국에서 대만 오기 전 한 달간 학원에서 배운 기초 중국어를 총동원해 성심성의껏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시험지를 끝까지 채워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어떤 도전이든 시작은 이렇게 불확실한 자신감으로부터 오는 법이니까.



며칠 후, 레벨 테스트 결과가 발표되었다. 솔직히 그녀는 자신이 가장 낮은 반에 배정될 줄 알았다. 하지만 예상 외로 초급반보다 한 단계 위 반에 이름이 올라 있었다. 시험지를 꽉 채운 덕분인지 아는 것을 있는대로 모두 적어낸 용기가 선방을 한 셈이었다. 배정표를 살펴보니 반 구성원 대부분은 한국인과 일본인이었다. 책과 필기구를 사러 서점에 들렀고, 오렌지색 표지의 교재를 받아들고 첫 장을 펼쳤다.

순간.. 막막함이 밀려왔다.
수많은 한자, 낯선 병음(拼音), 그리고 저마다 다른 성조와 발음들.


이제 이 모든 것들이 그녀의 입 밖으로 나와야만 이곳에서의 "소통"과"생활"이 비로소 시작될 수 있을 터였다. 다음 날, 배정받은 교실에 들어섰다. 그녀는 그 반의 유일한 여학생이었다. 교환학생으로 온 한국인 남학생들, 워킹홀리데이로 대만에 체류 중이라는 또 다른 한국 오빠, 그리고 전부 교환학생이라는 일본인 남학생들. 그리고 조금 늦게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온 마지막 일본인 학생. 그는 며칠 전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쳤고, 레벨 테스트에서 그녀 옆에 앉았던 그 일본 남학생이었다. 돌아가면서 자기소개를 했다. 학생들은 각자 이름과 출신, 간단한 인사를 나누었다. 그녀도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이지안(李知安)이에요. 만나서 반가워요."


"안녕하세요. 야마모토 히로아키(山本 宏秋)입니다."


일본인들은 참 이름이 길었다. 특히 마지막 학생의 이름은 무려 8음절이나 되었다. 한국인 이름은 보통 3음절이거나 길어도 4음절인데 일본인들의 이름은 기본 6음절 이상부터 시작되서 또박또박 발음하지 않으면 외우기도 힘들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교실 앞에 밝은 미소와 쾌활한 목소리를 지닌 선생님이 등장했다. 짧은 머리에 경쾌하고 큰 목소리를 가진 여자 선생님은 영어와 중국어를 섞어가며 수업 일정과 교재 구성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그 설명이 끝날 무렵, 이지안은 대만에 온 이후 처음으로 가슴이 두근거리는 감각을 느꼈다.


비록 어학당일지라도 자신은 교환학생이 아닌 정규 입학생도 아니었지만, 드디어 어딘가에 소속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제 이 교실의 일원이었다. 입시의 실패도, 이국의 외로움도 그 순간만큼은 모두 뒤로 밀렸다.


그녀는 지금 드디어 ‘시작’이라는 감각을 얻었다.




어학당 수업은 무척 재미있었다. 무엇보다 입시와 전혀 무관한 공부가 이렇게 즐거울 줄은 몰랐다. 수업이 끝나면 같이 밥을 먹고, 대만에서 처음 마신 버블티의 달콤함에 감격하며 반 친구들과 찍은 사진들이 쌓여 일상은 어느새 그녀의 삶을 부드럽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녀는 문득 깨달았다. 자신이 무의식중에 일본인에 대해 막연한 반감을 갖고 있었음을. 하지만 매일 얼굴을 마주하고, 웃고, 대화를 나누는 사이 그 감정은 조금씩 옅어졌다. 반에서 가장 어린 유일한 여학생이었던 그녀는 국적에 상관없이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지안짱~”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국적이 다른 사람들이 같은 목표 아래 연결되는 경험. 그 안에서 그녀는 처음으로 해방감을 느꼈다. 숨 막히던 점수 중심의 삶에서 벗어나 외국어로 자유롭게 말하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그녀를 조금씩 환하게 밝혀주었다. 스스로 짠 시간표, 다양한 수업 활동, 늘어가는 어휘력은 모두 그녀를 더 나아가게 했다.


미래에 대한 불안은 여전했지만, 분명한 건... 이제 그녀는 예전보다 훨씬 밝아지고 있었다.


아침이면 단골 가게에서 어느 덧 중국어로 당당하게 주문을 할 수 있게 된 자신을 깨달았다. 어눌하지만 또박또박 말할 때마다, 가게 주인은 지안을 알아보고 “你說得真好! (너 말 잘하네!)" 웃으며 칭찬을 건넸다. 그녀는 늘 같은 음식을 먹었지만 그날따라 가게 주인의 칭찬이 하루의 기운을 바꾸는 주문처럼 느껴졌다.




어느 덧 이번 학기의 마지막 종강일이 다가오자 선생님은 이번 학기의 하이라이트라며 스린야시장(士林夜市)으로 떠나는 현장 수업을 예고했다. 스린야시장 근처 베이킹 센터에서 대만의 대표 디저트 펑리슈(鳳梨酥) 만들기 체험이었다. 대만에 도착한 이후 어학당 생활과 그 주변은 익숙해졌지만 이렇게까지 멀리 나가본 적이 없던 지안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아침부터 분주하게 준비했다.

베이킹 센터에 도착하자 향긋한 파인애플 향이 실내를 가득 메웠다. 학생들은 반죽을 꾹꾹 눌러 모양을 만들고 그 안에 노랗고 달콤한 잼을 정성스럽게 채워 넣었다. “요물조물”이라는 표현이 딱 맞았다. 만드는 과정은 고요하고, 따뜻하고, 그리고 달콤했다.


현장 수업이 끝나고, 학생들은 종이봉투에 펑리슈를 담아 들고 근처 스린 야시장을 둘러보자며 흥겨워했다.

지안은 세상 모든 것이 처음인 사람처럼 반짝이는 눈으로 이곳을 바라보았다. 얼마나 걸었을까.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함께 걷던 학생들이 하나둘 귀가했고, 남은 사람은 지안과 그 일본 남학생 히로아키 단 둘뿐이었다.


평소 수업시간 그리고 밥을 같이 먹기는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다같이 있을 때였지 이렇게 단 둘이 남겨진 적은 없었기 때문에 당황스러웠다.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 걸 느낀 지안은 바디랭귀지를 총동원해 어색한 농담을 던지며 스몰토크를 이어가려 애썼다.


하지만 대화 주제도 바닥났고 하루 종일 걷느라 피로도 한계에 다다랐다. 이제 돌아가야겠다 싶어 가볍게 인사를 하려던 순간이었다. 그가 슬며시 그녀의 옷깃을 가볍게 잡더니 멈칫거리며 입을 열었다.


“저기, 있잖아…”


지안은 멈춰 섰다. 그리고 그를 응시했다. 혹시 내가 뭔가 실수를 했나..? 라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하지만 표정과 그의 말이 단순한 작별 인사나 감사의 말은 아니라는 걸 직감했다.


“응?”


“나 너 좋아해. 너뿐이거든.”


방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그 순간, 지안은 말문이 막혔다. 무언가를 잃지도 얻지도 못한 채. 그녀의 손엔 펑리슈 봉투만 남아 있었다. 그리고 펑리슈를 베어 물던 손이 무의식적으로 봉투 속으로 쿠키를 다시 넣었다. 서툰 중국어였지만 의미는 분명했다. 히로아키의 얼굴은 대만의 야시장 불빛만큼이나 붉게 물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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