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다의 첫 소설『대만졸업』은 개인적 경험을 바탕으로 한 창작 소설입니다.
현실의 인물, 사건과 유사하더라도 이는 우연의 일치입니다.
일부 인물 및 장소는 서사의 흐름상 가명 또는 허구적 설정을 사용하였습니다.
갑작스러운 그의 고백을 듣고 대답도 못 한 채, 급하게 작별 인사를 하고 MRT(대만 지하철)을 타고 기숙사로 돌아가면서 그녀는 가슴이 몹시 두근거렸다. 인생 처음으로 이성한테 받아보는 고백으로 끌림과 동시에 불안감이 번갈아 가면서 느껴졌다.
대만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수능에 실패하고, 어학당 외에는 아무런 소속감이 없는 어린 이지안의 마음은 불안에 떨었다.
그녀가 주입식으로 배운 연애란 열심히 공부해서 입시를 성공적으로 마친 뒤에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연애는 그런 것이었다. 당당하게 대학 가서 하는 거라고 늘 학군지에서 어른들에게 들었던 것이 있었기 때문에 입시에 실패한 그녀 역시 연애는 관심 밖이었고, 나아가 사치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년에 그녀는 대만에서 대학 입시를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고민하고 있는 모습이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이렇게 외국어 공부 외에 다른 것에 신경 쓰라고 부모님이 없는 형편에 유학 비용을 대준 것이 아닐 거라는 생각에 일말의 죄책감까지 느껴졌다.
'그래 이건 아니야..'
고백받은 것은 고맙지만 정중하게 내일 그에게 어학당에서 만나면 거절하고자 마음먹었다. 어떻게 거절을 해야 할까. 중국어로 말을 해야 하는 것일까 하지만 배운 중국어가 없었다.
다짜고짜 배운 단어를 써먹자니 '나는 너 싫어해' 문장이 나오는데 그녀의 마음은 그런 게 아니었다. 아니면 일본인인 그를 존중해 일본어로 거절을 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도 있다. 결국 밤을 새운 그녀는 한국에서 가져온 전자사전을 미리 가방 속에 집어넣었다.
다음 날, 그녀는 어학당에서 수업을 들으러 가는 엘리베이터에서 그를 만났다. 그녀를 본 그는 밝게 웃으며 그녀한테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괜스레 가방 안에 있는 전자사전이 신경 쓰였다. 도대체 오늘 언제쯤 제대로 고백에 대한 거절 의사를 전하는 게 좋을까라고 눈치만 보고 있었을 뿐이다.
3시간의 수업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도 모른 채 그녀의 머릿속에는 거절 의사에 대한 생각으로 엉킨 실타래가 굴러다니는 듯했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점심을 먹으려 가려는 그를 그녀는 넌지시 계단 구석으로 불렀다.
깊게 호흡을 쉬며 가방 속에 전자사전을 얼른 꺼내며 그녀는 자신의 거절 의사를 표현했다. 또박또박 단어를 한국어 타자를 치며 일본어로 단어를 바꾸었다. 전자사전 화면에는 이윽고 5개의 일본어 단어가 표시되었다.
나( 私 ) / 내년(来年) / 대학(大学) / 사랑(愛) / 불가능(不可能)
한참을 바라보던 그의 얼굴은 잠깐 일그러지다가도 또 잠깐 웃음이 새어 나기도 했다. 그의 반응에 당황한 그녀는 멀뚱멀뚱 그의 얼굴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뭐지? 내가 말한 게 잘 전달이 안 되었나. 그래도 나름 예의 바르고 공손하게 의사표현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다시 한번 단어를 쳐서 보여줘야 하나 고민했다. 다시 전자사전을 열어 타자를 치려는 그녀의 전자사전을 한 손으로 닫으며 다른 한 손으로는 그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 나 너를 좋아해. 그리고.. 너.. 예쁘고 귀엽다 "
대만에서 서로 중국어를 본격적으로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극히 제한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그가 얼마나 진심을 다해 자신에게 마음을 표현하고 있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설령 그 표현이 유치할지언정 그는 최선을 다해서 자신이 배운 중국어 단어 중에서 가장 좋은 단어를 고르고 골라서 말하고 있었다.
아... 다시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건 어제저녁에 느꼈던 그 불안함이 아니었다.
설렘이었다. 호감이었다.
그녀도 모르게 자신의 손을 잡은 그의 손을 꽉 잡고 말았다. 그제야 그는 안도하듯 입꼬리를 올렸다
굳이 서로가 말을 하지 않아도 그것은 사귐의 시작이었다.
그렇게 어학당에서 그녀와 그는 공식적인 한일커플이었다. 그녀 외에도 이미 많은 사람들이 서로 자신과 다른 국적의 사람들과 연애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국제연애는 그렇게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중국어 향상을 위해 전략적으로 대만 사람들과 교류하고 연애를 하고 있는 외국인들도 있었기 때문에 이 점에서 본다면 정말 감정적으로 서로 호감을 느껴 사귀는 것은 그녀가 유일했고, 한일커플의 주인공도 그녀가 유일했다.
그러나 그녀와 그의 사이에는 전자사전이 없으면 대화를 이어가기 힘들었기 때문에 난처한 일들이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더욱 열심히 그를 알아가고 싶었고 중국어뿐만이 아니라 간단한 일본어도 알고 싶어졌다. 이런 그녀의 마음을 주변 일본인들도 귀엽게 여기며 간단한 것은 열심히 알려주었다.
시간은 어느덧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이제는 대만 환경이 조금씩 익숙해져 갔고, 처음 도착했을 때 마주한 낯섦도 친숙함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가 옆에 늘 있었기 때문에 외국 생활이 외롭지가 않았다.
그는 이 타국에서 나의 가족이자, 동갑 친구이자 그리고 연인이었다.
주변에서는 한국 여자와 일본 남자가 사귀는 것에 대해 조금은 우려 섞인 시선과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아무래도 한국과 일본은 양국 사이가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기 때문에 두 사람 사이에도 혹시 문제가 있지 않을까 하는 우려였다.
하지만 다행인건지 그 당시에는 둘 다 외국어 실력이 뛰어나지 않아 그렇게 한일 양국 간의 시사 문제에 대해 깊은 대화를 나눌 수가 없었기 때문에 싸울 일은 없었다.
드디어 봄학기가 끝나고 여름학기로 넘어가는 시점에 짧게 일주일간 방학 기간이 주어졌다. 한 학기동안 열심히 배워 너무나도 알찬 시간이었고 그 사이에 중국어가 늘어서 뿌듯했다.
기분 좋게 마지막 수업을 마무리하고 나오는데 그가 그녀에게 일주일 방학 동안 무엇을 할 거냐고 물어봤고, 그녀는 지금 딱히 계획이 없다고 했다.
" 지안. 그럼 우리 오토바이 타고 대만 여행 갈래? "
" 응? 너 오토바이가 있어?"
" 응 같이 가자. 나 오토바이 운전 할 줄 알거든"
아.. 그녀는 표정 관리가 잘 안 되었다. 본래 오토바이는 불량한 학생들만 타는 것이 아니었던가. 대만에 도착한 지 3개월 차, 일본인 남자 친구가 생기고 그와 함께 오토바이를 타고 대만 섬 전역을 돌 계획을 짜고 있었다.
그러나 재미있을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녀는 범생이처럼 살아온 지난 학창 시절이 생각도 안 난다는 듯이 연신 고개를 끄덕거리며 배시시 웃었다.
" 좋아.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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