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만두세요? 이렇게 좋은데

문창과 졸업생의 직장생활 적응기 05

by 노루

스물세 살. 초짜 직장인. 우리 팀에서도 회사에서도 나는 막내였다. 20대가 주를 이루었던 회사의 분위기는 아주 캐주얼했고 모든 사람들이 신기할 정도로 친절했다. 대학교 언니들과 다르지 않았다. 누구든 모르는 걸 물어보면 잘 알려줬다. 남자들만 있던 우리 팀에서는 내가 적응하지 못할까 봐 다른 팀의 여자 선배들과 밥을 먹도록 붙여주었고, 어려운 금융상품을 이해하지 못해 허덕일 때면 팀장님은 요청하지 않아도 따로 나를 회의실로 불러 상품설명서를 붙들고 과외를 시켜주었다. 너무 고마워서 첫 월급을 타고는 팀원들에게 작은 선물을 돌리고 카드도 썼다. 작업에 문제가 있으면 혼이 나기도 했지만 또 잘하면 칭찬을 받기도 했으니까 괜찮았다. 나는 칭찬에 무장해제되는 단순한 사람이라 그냥 그거면 됐다. 칭찬 한 번이면.


근무가 끝나면 한 달에 두세 번쯤 팀장님이 의자 바퀴를 쓱 굴리며 내 자리로 다가왔다. 퇴근하고 약속 있니? 밥 먹고 가. 회식이었다. 나는 사실 그 자리를 꽤나 좋아했다. 회식자리에서는 다른 팀 선배들과도 편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고, 맛있는 밥도 공짜였고, 술도 공짜였고. 다들 함께 놀듯이 와와하고 웃고 떠들다 적당히 취해 흔들흔들 걸어가 지하철을 타고 집에 들어가면, 나 직장생활하는 사람이구나, 하는 게 실감이 났다. 출근도 하고, 퇴근도 하고, 회의도 하고, 컨펌도 받고, 회식도 한다. 나 회사 다닌다. 지점이 좀 이상하긴 했지만 그랬다. 엄마가 맨날 술 마시고 늦게 들어온다고 야단을 치면 그런 말을 했다. 엄마, 사회생활 하다 보면 회식도 가고 그럴 수 있는 거잖아. 근무의 연장인데. 어디 드라마 같은 데서 그런 말 하는 걸 본 적이 있었다. 그걸 내가 똑같이 따라 했다.


그렇게 회식을 마치고 출근하면 꼭 며칠 안으로 누군가가 사무실을 조용히 돌아다니며 인사를 하고, 퇴근 대신 퇴사를 했다. 오래 못 봐서 아쉽네요. 하면서. 그러다 옆 팀의 내가 아주 좋아했던 선배가 어김없이 송별회를 맞이했을 때 나는 자리가 끝나고 해산하며 이런 얘기를 하게 된다. 왜 그만두세요? 이렇게 좋은데.


높은 건물이 가득한 오피스 타운으로 출근해 아침회의를 하고, 사무실에서 글을 쓰고, 점심을 먹고, 다시 글을 쓰다가 회의를 하고 자료를 찾다 보면 퇴근시간이 된다. 내일 할 일을 적어두고 컴퓨터를 끈다. 그렇게 한 달을 일하면 세금 제하고 180만 원 정도가 월급으로 떨어졌다. 알바를 주말이나 평일 며칠 오후에 끊어서 했던 내게 최고의 월수입은 그전까지만 해도 방학에 공장에서 일해 벌었던 90만 원 정도였다. 지금이야 시급이 만 원 돈 한다지만 그때는 4,500원 정도였으니까.


나는 그게 참 좋았다. 내가 그렇게 180만 원 치의 어떤 일을 했다는 사실이 못내 뿌듯했고 자랑스러웠다. 엄마가 지갑에 넣고 다니는 내 취업사진을 보는 일이, 첫 월급으로 아웃렛에서 엄마의 가방과 아빠의 봄잠바를 사다 준 일이, 치킨을 시키며 내가 쏜다, 하고 말하는 일이 참 좋았다. 어려운 상품 자료를 집에 들고 와 주말에 몇 번이고 읽는 일도 싫지 않았다. 내 일이니까. 내가 돈 받고 하는 내 일이니까. 바쁘다가도 다 해치우고 나면 해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고. 그래서 나는 왜 사람들이 회사를 그만두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누군가는 유학을 간다고 했고, 누군가는 이사를 간다고 했다. 누군가는 쉬고 싶다고 했고, 누군가는 아는 선배가 사업을 해서 도와주기로 했단다. 그렇게 저마다의 이유를 달고 사람들은 자꾸만 사라지고, 그리고 다시 채워졌다. 그러는 동안 나는 언제나 그랬듯이 어렵지도 않게, 언제는 바쁘고 언제는 한가롭게 그저 무난하게 직장생활을 이어오고 있었다. 그때 우리 회사는 공휴일을 연차에서 깠다.(지금은 불법인데 그때는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연차는 일 년에 네 개 남짓이었는데, 그마저도 하나를 쓰지 않았다. 연말이면 찾아오는 입찰 시즌도 무리 없이 견뎌냈다. 야근이 종종 있었는데 제안서에 들어갈 콘텐츠 시안을 만들어 디자인팀에 넘겨야 퇴근할 수 있었다. 근데 그 야근마저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 뿌듯하기도 했다. 이 정도면 확실히 '뿌듯 중독자'가 맞았다.




keyword
이전 04화전공이 직장생활에 미친 영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