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년생 김지영>이라는 영화 한 편이 또다시 남성과 여성의 양쪽 끝에 서 있는 이들의 논란이 되고 있다. 영화 한 편으로 우리 시대의 독립 인격체로의 여성의 문제, 결혼한 여성으로서 출산에 따른 육아와 자기정체성의 문제, 그리고 그러한 모든 문제를 안고 견뎌내고 있는 어머니로서의 문제를 다 언급하려다 보니 세상 모든 악재를 떠안고 사는 '김지영'이라는 인물이 주인공이자 그 논란의 중심이 되었다.
이에 일각의 여성의 끝에 서 있는 분들의 여성에 대한 차별을 성토하는 의견이 영화를 통해 표출되었고, 영화의 내용이 문제점 위주의 극단적인 면만을 부각시킨 것이 남성의 끝에 서 있는 이들에게 있어서는 마찬가지로 남성들만이 의무를 지고 있는 군복무문제와 사회적 압박감에 대한 거친 반발로 신경을 곤두서게 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어느 쪽이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왔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나는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 남성으로서, 한 여성의 남편으로서, 두 딸의 아버지로서 '김지영'이라는 여성에 삶에 대해서 충분히 공감할만하고 고민해야 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여 영화에 나왔던 대사 중 생각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는 몇 가지에 대해 의견을 말해보고자 한다.
뭐 애 하나 생긴다고 크게 달라지겠어? - 과연 그럴까?
<82년생 김지영> 中 대현과 지영의 대사
책임있는 부모가 되는 것은 어렵다. 출산과 함께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부여되는 의무는 아이가 성인이 될 때가지 부모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일이다. 결혼 후 아이가 생기기 전까지는 금전적 부담과 시간적 제한성 정도의 불편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실제로 겪어보면 실상은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직장에 다니고 있는 이들이라면, 육아휴직이나 탄력적 근무제도 등을 통해서 일과 육아를 병행하기 조금은 수월할 수 있겠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는 그런 부분에 있어서 지극히 폐쇄적임을 부인할 수 없다. 영화 대사에서도 '과연 그럴까?'라는 의문이 괜한 것은 아니다.
현실적인 이유로 정년 퇴직을 하는 직장인의 대부분은 남성인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최근은 평생직장의 개념이 사라지고 있고, 남성들의 가장의 책임도 커져 힘들지만, 결국은 남성은 사회로 여성은 가정으로 선택하지도 않은 역할을 부여받게 된다. 여기서 뭇 남성들은 수입과 경제적 상황에 의해 선택되어지는 것이지 여성이라서 가정으로 내몰리는 것은 아니라는 반박을 할 수도 있다. 그런 경우도 있지만 생각해보자. 그럼 왜 여성의 사회적 활동도 지켜주면서 함께 아이를 키울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그런 방법에 있어서는 너무나도 많은 요즘인데도 어쩌면 우리 사회가 귀찮음에 외면하고 있는 것을 아닐까?
아이들 달래며 식사를 준비하는 지영
가끔 행복하기도 해요. 또 어떤 때는 어딘가 갇혀 있는 기분이 들어요.
<82년생 김지영> 中 지영의 대사
나의 아내는 결혼하기 전 유명한 기업의 임원 비서였다가 결혼해서는 이름있는 회계법인의 임원 비서였다. 업무의 스트레스 때문이었을까? 우리가 고대하던 아이가 생기지 않았고, 이에 꽤 힘든 과정을 거쳐 비로소 아이가 생기게 되면서 부득이하게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다. 아이가 쌍둥이였던 터라 육아와 회사일을 함께 하기는 경제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어려운 상황이었다.
어느덧 아이들은 8살이 되어 초등학교를 다니게 되자 아내는 많은 고민이 밀려든다고 말했다. 함께 있으면 행복하고 아이들의 커가는 모습에 감사하기도 하지만, 나는 지금 무얼하고 있는 걸까 하는 멍한 생각이 든다고 했다. 돌아가는 세탁기 소리가 지겹고, 마치 쳇바퀴도는 빨래의 모습이 자신의 모습 같다고.
영화 속 '김지영'의 모습도 나의 아내와 같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이를 키우고 가정의 살림을 꾸려나가는 역할이 정말 중요한 일이기는 하지만 선택한 삶이 아닌 선택되어지는 삶에 있어서는 자신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자괴감이 들 수 도 있을 것이다. 남성들도 다람쥐 쳇바퀴 도는 회사생활이 지겹다고 하겠지만 일을 통해 급여를 받고 사회로부터 인정을 받아가는 자존감이 있을 수 있겠지만 많은 여성들의 경우 작아져만 가는 자신의 자리에 다리가 후들거려 주저 앉을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아이를 바라보며 누군가와 전화를 하지만 어떤 생각으로 대화를 하는 지는 표정이 없다
세탁기에 갇혀 쳇바퀴 도는 빨래나 나는 뭐가 다를까?
지영아, 너 하고픈거 해
<82년생 김지영> 中 미숙의 대사
따뜻한 말인 것 같지만 참으로 무책임한 말일 수도 있다. 시간이 많이 지나고 사회로부터 동떨어진 삶을 오래토록 살아온 '김지영'으로서 잘하는 일을 어느 정도 잘해낼 수 있을 지, 현실적인 문제들이 눈 앞에 들이닥쳐 있는데 좋아하는 일, 하고 싶은 거를 다할 수 있는 여건이 되는지 고민하지 않은 말이다. 친구의 마음을 달래주기 위한 '미숙'은 안쓰러운 마음에 던진 말이겠지만, '지영'은 그 말 또한 그 어떤 자신의 상황보다 더 어려운 선택이 될 것임이 분명하다.
우리네 삶 속의 '지영'은 반드시 본 상황을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지영'이 고민해야겠지만 꼭 선택할 수 있게 도와야 한다. <82년생 김지영>, 이 영화는 단순히 사회로부터 모질게 밀쳐지고 있는 이 시대의 '김지영'에 대해 고발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도 살아가고 또 태어날 또 다른 '김지영'들과 함께 살아갈 우리들의 미래를 위해 이러한 문제들을 함께 고민해보자는 제안이다.
선택해야 한다. 선택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나는 지금 <82년생 김지영>과 함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우리의 고민 사이에서도 티 없이 맑게 자라고 있는 두 딸과 함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우리 딸들은 나중에 자라서 또다른 '김지영'이 될 것이고, 그 때는 지금 <82년생 김지영>이 고민했던 여러 문제들이 있었는지도 모른 채로 밝고 건강한 웃음으로 모두가 함께 살아가는 '김지영'이 될 것이다. 아니 '김지영'이라는 이름조차 모르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 우리가 부딪치는 이 생각들이 서로를 할퀴는 날카로운 혀가 아닌 따뜻한 가슴이 되어 서로를 안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