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전 통영에서 특강을 했다. 마치고 초대해주신 분들과 단촐한 술자리가 있었는데, 통영과 음악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잠자코 있다가 나도 대학시절 밴드를 했다고 하니까 다들 놀랬다. 이해는 된다. 대부분 내 세대가 그렇듯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너무 다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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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국민대 마젠타라는 그룹사운드에서 드럼을 쳤다. 94학번인 나는 17기였는데, 약 25년이 지났으니 지금은 몇기지? 17+25... 아... 음... 아무튼 엄청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후배들은 전화를 준다. "형님(좀 민망한 호칭이다) 저희 이번주 언제 공연합니다. 혹시 오시나요?" 그럼 "어...어... 미안.. 이번에 어려워.." 하고 끊는데, 생각해보니 지난 10여년내내 같은 말을 반복했다. 미안하다 얘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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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를 꺼낸 첫번째 이유는 자랑이고, 두번째는 저 동아리가 어떻게 40년이 넘게 유지되는지 그 이유를 말하기 위함이다. 1학년때 마젠타에 들어가면 무조건 연습생이 된다. 악기 파트별 사수는 2학년이다. 2학년은 마젠타의 꽃이며 주인공이다. 내외부 모든 공식 행사는 2학년이 수행하며, 다른 학년들은 모두 2학년을 위해 존재한다. 이를 우리는 활동기수라 말한다. 활동기수를 마치면 대부분 휴학하거나 군대를 간다. 너무 진을 뺐기에 좀 쉬어야 한다. 복귀하면 학년 구분은 사라진다. 모두 통칭해 오비(올드한 기수들)라고 말한다. 오비는 활동기수의 연습을 돕고, 장비를 챙겨주고, 새로 오는 기수를 챙긴다. 물론 간간히 무대에 선다. 1학년과 동일하거나 약간 많은 수준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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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쩌다 1학년 말에 마젠타에 합류했다. 그래서 실력이 개판이었다. 그래도 동생들과 형님들은 격려했고 존중해 주었다. 오비가 되어서야 약간 연주가 가능했는데, 오비밴드에 워낙 기라성같은 선후배들이 많았음에도 그들과 비슷한 곡수를 연주했다. 마젠타는 그런 문화였다. 내가 들어오기전에 마젠타는 두개의 기수가 빠져서 위기였다. 그래서 오비기수가 대신 공연을 했는데... 그분들은 실력이 너무 뛰어나서 거의 프로같았다. 우리는 그 형님들을 늘 선망했는데, 활동기수가 채워진 뒤로 형님들은 늘 뒤에서 우리를 챙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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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에도 몇차례 존폐 위기가 있었다. 활동기수가 채워지지 않아서이다. 능력이 출중한 선후배 연주자들이 있어도 무조건 활동기수 우선이기에 활동기수가 위험하면 마젠타 사람들은 모두 존폐위기라 느꼈다. 그렇게 이 동아리는 40년을 넘게 굳건히 버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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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마젠타를 떠올리며 우리 사회를 생각한다. 어제 디자인학교에서 강연한 이병한 선생의 무명시절, 유라시아견문 중간에 한국에 오면 새벽까지 맥주를 마셨다. 그때 주고받은 대화중 기억나는 대목이 "우리는 시대의 주인공이 아니다. 후배들이 도약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디딤돌 역할에 만족해야 한다"라는 내용이었다. 그렇다. 나는 마젠타에서는 능력 없이도 주인공을 했지만, 사회에서는 주인공이 될 운명이 아니었다. 그래도 다행이다. 뛰어남을 넘어 능력이 탁월한 이병한 선생도 주인공이 아니니까. 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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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학번은 여전히 청년이다. 40대임에도. 30대인 00년대 학번은 그냥 후배들로 퉁친다. 82년생으로 대표되는 그들은 너무 불쌍하다. 그래서 난 늘 그들에게 말한다. "형이 옆에 있어줄께" 하지만 10년대 학번들에게는 다르게 말한다. "너희들은 시대의 주인공이 된다. 비관하고 좌절하지 말고 준비해라. 너희들의 시대가 왔을때 멍청하게 당하지 말고!"라며 다소 강하게 진심으로 독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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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 사회는 50~80년대 학번이 70년째 혹은 40년째 주인공을 하고 있다. 마젠타로 치면 오비기수들이 활동기수 역할을 내려놓지 않고 내외부 공연을 모두 독차지 하는 상황이다. 1학년과 활동기수인 2학년은 오비 형님들 뒤치닥거리에 만족한다. 가끔 불만을 터뜨리면 형님들은 너희들은 아직 준비가 안되었고, 능력이 안된다며 우리를 다독인다. 씨... 마젠타 형누님들은 능력 안되도 주인공 시켜줬는데... 그래도 어쩔수 없다. 이 사회는 동아리 마젠타가 아니라 엄혹한 메리토크라시(능력중심사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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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나에게 "넌 어떻게 그 많은 일을 해?"라며 걱정한다. 그때마다 이렇게 말했다. "응 나는 내가 직접하지 않아. 그냥 그분들 곁에서 들어주고 약간 도와주는 역할만 하면 돼 그래서 딱히 힘들지 않아". 이런 나의 경험을 통해 시대적 조연의 역할이 무엇인지 고민해 보았다. 오락과 향연으로 시간을 죽이며 디딤돌 역할만 하기엔 좀 아깝다. 좀 더 적극적인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생각한 역할이 '산파'와 '교사'다. 이 단어는 최근 습득했는데 생각해보니 디자이너인 나는 이미 오랜시간 나를 그렇게 규정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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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런 현실이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어쩔수 없다. 아직 파릇한 20년 후배들 옆에서 산파나 교사 역할을 하면 늘 당부한다. "너희들은 너무 주인공 오래하지 마라. 후배들이 능력 없어도 마땅히 그들에게 주인공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고. 모두가 주인이고 주인공일수는 없다. 골고루 주인공이 되려면 순서대로 가야한다. 즉 죽이되든 밥이되든 어떤 시점에서 특정 세대가 세상을 경영해봐야 한다. 그렇게 모든 세대가 주인공 경험을 해봐야 마젠타처럼 소외되는 이가 없다. 민주주의가 이런거 아닌가. 마젠타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