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해서 무심하게 지나는 순간이 모이고 쌓여 나를 흔들던 그 때
"당신, 자전거 타볼래?"
물어보는 그의 속내가 빤히 보였다.
몇 주 전 내가 던진 선전포고가 눈치 보며 대충 몸 사리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거라 판단하고 새로운 작전을 내놓은 거다. 행복한 결혼생활이라 믿고 살던 남편에게 중년의 아내가 어느 날 정색하고 목소리 깔고 말했으니까.
"당신과 이렇게 계속 살아야 하는 건지 진지하게 생각해봤어. 결단을 내려야 하는 시간이야."
그는 결혼 첫날 밤보다 백 배 긴장해야 한다.
나이 사십에 不惑의 비결이 중심이 견고하기 때문이라면 곧 반백 살 되고 知天命하여 빼도 박도 못하기 전에 수를 써야 했다. 공자님은 삼십 대에 학문의 기초를 확립하셨다지만, 나는 삼십 대에 결혼의 기초를 세우느라 속이 썩고 몸도 바스러진 중년의 아줌마가 되어 지난 두 달 동안 주말 내내 골프와 회사 행사로 뛰쳐나가는 남편 뒤통수만 쏘아보고 있다.
적당히 속 썩이며 자식 노릇하는 착한 두 딸에 엄마 노릇하면서 직장과 가정 사이에서 줄타기도 잘하고 여기까지 왔는데, 더 이상 바라면 욕심이라고, 왜 새삼스럽게 이혼까지 생각하느냐고, 남편이 할 질문을 내가 나에게 먼저 던져 본다.
당연해서 무심하게 지나는 순간이 모이고 쌓여 나를 흔들고 있었다.
꾹 눌러져 꺾여버린 치약의 허리가 내 허리 같고, 돌돌 말려서 던져진 양말이 내 얼굴 같고, 시커먼 털들이 흩어진 욕조 구석이 내 몸 같다. 강산도 두 번이나 바뀔 만큼 함께 살았는데 왜 이 장면은 바뀌지 않는 거지? 해리포터도 이제 어른이 되었던데 우리들의 시리즈는 그대로인 거야? 다음 시즌에도 같은 캐스팅이라면 난 하차할래.
부부에게 충고해주는 모범답안 따위, 그럭저럭 참고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고문이다. 차라리 눈물 콧물로 얼룩져 너덜너덜한 누군가의 오답노트를 펼치며 나에게 남은 작은 희망과 위안을 붙잡는 것이 나을 테다. 그래, 바람은 안 피우니까, 노름으로 가산 탕진한 것도 아니고, 착실하게 직장 다니고 막말 던지는 못된 놈은 아니니까, 하면서.
그 가난한 자위조차 약발이 들지 않았다. 나는 서로 어떤 생각을 하고 사는지 궁금하지도 않은 무감각한 시간들이 두려웠다. 우리는 평균 이상의 파트너라는 자부심이 별 이유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이대로는 안돼.
나 혼자 밤잠 설치며 답을 찾으면 뭐해?
그가 변하지 않으면 소용없어.
스포츠댄스라도 손잡고 배우면 어떨까.
내가 정말 원하는 것도 알지 못하는 답답함이 불혹의 시대를 지나는 나에게 진동을 보낸다. 계속하지 않으려면 새로운 시작으로 극복해야 돼. 깊은 속에서 숨어있던 종이 땡땡땡. 어서어서 항로를 바꾸라고 부추긴다.
바람도 불지 않고 별도 뜨지 않은 밤, 어두운 바다 한가운데 있었다.
이 바다 위로 자전거를 타고 달려가면 새 땅을 만날까?
바다가 갈라지고 광야에 헤매다가 목마르면 바위에서 물이 솟아나고 배고프면 하늘에서 만나가 내려올까?
열 살 소녀가 무릎에 피를 흘리며 중심을 잡고 자전거로 달려 나가던 그 첫날처럼,
새로운 능력을 가진 나로 바뀔 수 있을까?
남편을 지팡이를 잡은 모세까지는 아니어도 내 뒤에서 자전거를 붙잡고 있다고 외쳐주던 아버지의 목소리처럼 정말 믿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