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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단한 Aug 09. 2022

'의외로' 무척이나 소심한 사람입니다

'흐름에 따라가는 사람이다', '조화와 균형을 중시하는 사람이다', '어떠한 논쟁에서 이기는 것보다 누군가가 상처받는 것이 더 신경 쓰인다', '결과보다는 과정을 중요시하는 사람이다', '느긋하며 남들 앞에 나서지 않는 유형', '수용적이며, 남에게 위안을 주는 사람', '본인의 감정을 숨기는 것에 도가 튼 사람', '나보다 남의 분위기를 더 살피는 사람'…….  [당신은 평화주의자, 감성적인 여행자 타입입니다.]


눈에 보일 때마다 한 번씩 해보는 심리 테스트는 매번 같은 문장을 내민다. 당신은 평화주의자입니다, 감성적인 여행자 타입이에요. 누가 봐도 온화해 보이는 미소를 띠고, 튀지 않는 초록색 옷을 입은 캐릭터가 화면 안에서 열심히 깃발을 흔들고 있다. 그의 옆에는 주로 나와 같은 사람들이 행하는 행동의 특징이 요목조목 적혔다.


어느 새벽, 잠이 들기 전에 비스듬히 누워 인터넷의 끝없는 파도를 신나게 타던 나는 나열된 행동의 특징을 읽으며 천천히 가라앉는다. 말이 평화주의자지, 이거 순 바보 아냐, 중얼거리면서. 


하고 싶은 말을 똑 부러지게 하지 못하고, 그나마 하는 말도 상대가 상처받지 않게 하기 위해 빙빙 돌리고 또 돌리고, 그러다 논점을 잃어버려 얼버부리고, 희생하는 사람이 생기지 않기 위해 끝없이 노력하다 결국 자신의 희생을 감수하기도 하고, 외로움을 많이 타지만 혼자가 좋은……. 정말 이런 성향을 평화주의자라고 할 수 있을까. 


내가 꼼꼼히 읽으며 꾹꾹 누른 항목이 모여 만든 결과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속이 상해 화면을 꺼버린다. 괜히 센티해지는 새벽마다 테스트를 해서 결과가 이런 걸까. 아니, 아니다.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다. 남과 관련된 일에 있어서는 지극히 평화주의자, 나와 관련된 일에 있어서는 지나친 테러리스트. 많은 시간을 들이지 않고서도 나는 상대를 위해서 쉽게 평화주의자가 되곤 했다. 무조건 수용하고, 양보하면 되니까. 그러면 나도 편하고, 남도 편하고 모두가 평화로우니까. 그럼 나의 내면의 안정감과 균형을 잡기 위해 나는 나에게 어떠한 노력을 하는가. 없다. 노력하지 않는다. 나는 여태 내 평화를 떼다가 남에게 주기 바쁜 사람이라 나의 내면을 살필 겨를이 없다.


MBTI라는 알파벳 네 글자로 한 사람을 평가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그리 동의하지 않지만, 항목마다 갈리는 어떠한 성향에 있어서는 재미를 느끼는 편이다. 나는 ENFJ였다가, INFJ가 되었다. 나는 순식간에 조용한 사람이 되었다. 이게 원래 나일 텐데, 조용한 성향을 가진 내가 원래의 나일 수 있는데도 괜히 마음이 그랬다. 지극히 'I'인 인간이 아니라 내향적인 성향이 51%, 외향적인 성향이 49%였으니까 어쩌면 반반의 인간인데. 나는 외향적일 수도 있고, 내향적일 수도 있는데. 그런데도 나는 입을 다물었다. 마치 제자리를 찾은 것처럼. 


상대방은 나에게 '의외'라는 말을 많이 한다. 의외로, 조용하시네요. 의외로, 소심하시네요. 의외로, 생각이 많아 보이시네요. 의외로, 의외로. 나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또 순식간에 조용해지는 사람이 되고 만다. 나는 의외로 소심하면 안 되는 걸까. 나는 의외로 조용하거나, 의외로 생각이 많으면 안 되는 걸까. 


정확한 성향이란 없다. 그것은 어렵다. 사람들은 모두 내향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고, 반면에 외향적인 마음도 섞여있다. 어떤 것이 조금 더 넘치느냐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질 뿐. 지극히 평화주의자가 마음엔 테러의 한 부분을 품고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니까. 그것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고, 바꿀 수도 있는 것이니까. 우리는 우리 마음에 다양한 것들이 숨어있음을, 심어져 있음을 알아야 한다.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원하는 것을 키워내어 마음에 건강한 감정의 텃밭을 이룰 수 있음을 아는 것이 필요하다. 필요하지 않은 감정이나 면모는 없다. 적절하게, 키를 맞추고 농도를 맞춘다면 분명히 나에게 득이 되는 무언가를 만날 수 있으리라. 


집이나 밖을 돌아다니다 보면 바닥을 구르는 나사나 철사와 같은 어느 부품을 보게 될 때가 있다. 이것이 없어도 집은 무너지지 않고 밖은 멸망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나도, 조금은 몇 가지는 좀, 뺄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무너진 슬픔 젠가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나를 본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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