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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단한 Aug 06. 2022

'1'보다는 '2', '주인공'보다는 '친구'

무엇이든 제일 처음 하는 것보단 망설이길 좋아했다. 자신 있게 나선 친구, 혹은 어쩔 수 없이 불려 나간 친구가 먼저 하는 것을 보고 나름의 요령을 익혀 두 번째로 해냈다. 연극 영화라는 전공을 이어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대본을 받아 오디션을 준비하면서, 주인공 역할을 탐내는 친구들과 달리 나는 항상 주인공의 친구, 혹은 그 주변 역할을 탐냈다. 실패란 없었다. 첫 번째보다 두 번째를, 주인공보다 주인공의 친구를 탐내는 것은 당시 나 혼자뿐이었다. 경쟁할 상대가 없었기에 나의 앞길은 탄탄대로였다. 


사회에 나와선 나의 이런 꼼수 아닌 꼼수가 먹히지 않았다. 두 번째보다는 첫 번째가, 주인공의 친구보다는 주인공이 각광받는 세상에서 늘 두 번째이자 주인공의 친구였던 나란 사람이 주목을 받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이렇게 하면 뭐라도 되었는데. 반이라도 갔었는데. 사회는 냉정했고, 나는 얼어갔다. 첫 번째를 탐내기엔, 주인공을 탐내기엔 나란 사람이 너무 보잘것 없이 느껴졌다. 마음의 열등감이 점점 영역을 넓혀가고 있었다. 걷잡을 수 없는 파도 속에서 나는 번번이 숨이 막히곤 했다.


새벽에만 슬며시 찾아오는 열등감은 그나마 버틸만했다. 열등감에 빠지다 보면, 까무룩 잠이 드는 일이 잦았다. 그러면, 찌뿌둥하게나마 하루를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날이 밝을 때 찾아오게 되는 열등감은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완벽한 민낯으로 거울 앞에 앉아 있는 느낌이었다. 주근깨, 기미, 트러블 자국, 눈밑의 어둠, 붓기, 이런 것들이 고스란히 눈에 들어왔다. 나 빼고 모두가 예쁘고, 나 빼고 모두가 잘 되는 세상에 가만히 앉아 나를 들여다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남들의 장점을 잘 찾는 버릇만큼이나 더 빠르고, 더 정확하게 나의 단점을 파고드는 특기가 생겼다. 


그러다 내가 내 삶의 주인공이라는 것을, 오디션 따위 볼 필요가 없다는 것을, 남들에게 굳이 나를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남을 이해시키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았던 것은 언제쯤이었나. 1도 아니고, 2도 아니고, 3이라는 숫자를 나이 앞에 달고서 머리를 짧게 자른 어느 날, 나는 모든 것이 변했음을 어렴풋이 느꼈다. 잘린 머리카락에 대롱대롱 매달려있는 갖가지의 생각과 열등감을 뿌리치고도, 아주 얇게 돋는 새 머리카락처럼 순간순간 열등감에 흔들리곤 했지만. 나는 나를 알아가며, 내가 잘 해낼 수 있는 내 인생의 배역을 찾아가며 조금씩 나아갈 수 있었다. 


나는 내가 잘하는 것을 안다. 잘할 것을 안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알고, 내가 우울할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안다. 나는 내가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커피는 어떤 종류를 좋아하는지를 잘 알고 먹을 수 있다. 나는 내가 듣기 좋아하는 말과 듣기 싫어하는 말을 구분할 줄 안다. 나는 내가 어떤 색을 좋아하는지, 어떤 단어를 좋아하는지, 어떤 책을 좋아하고, 어떤 영화를 좋아하는지 안다. 나는 내가 울고 싶어질 때를 안다. 나는 내가 재미있어하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시간이 흐를수록 더 짙게 깨닫는다. 그러므로, 나는 나를 지킬 수 있다. 이 글은 내가 대단하다는 것을 말하려 하거나, 삶의 주인공은 바로 당신!이라는 닳고 닳은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이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다. 나는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이 문단의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길 원한다. 다시 돌아가 천천히 한 문장씩 읽었으면 한다. 다 읽은 후에는 당신이 조금 더 선명해졌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잘 몰라도 괜찮다. 두 번째여도 괜찮고, 그저 친구여도 괜찮다. 우리는 언제나 두 번째가 되고, 누군가의 친구가 될 수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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