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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단한 Aug 10. 2022

나는 모든 것을 자주 잊고 자주 잃는다

동네에서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내가 사는 동네의 모든 인물을 꿰뚫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작은 동네인지라 오며 가며 익힌 얼굴이 꽤 있곤 했는데. 저 여자는 정말이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얼굴뿐만이 아니라, 가지고 있는 분위기와 고양이처럼 눈꼬리가 살짝 올라간 눈매마저 처음 보는 것이었다. 민소매를 입고 있던 여자의 양쪽 팔뚝에는 자그마한 타투가 가득했다. 타투는 각각의 색을 입고 있었고, 저마다의 뜻이 담겨 있을 터였다. 자연산 곱슬머리인 듯, 부스스한 머리는 꼬불거리며 명치까지 내려와 있다. 나는 무례하지 않을 정도로만, 아주 살짝, 가끔씩 여자를 바라봤다. 여자는 남들의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정류장에 머무는 그 오랜 시간 나와 눈 한번 마주치지 않았다. 여자의 시선은 자신이 곧 걸을 길에 향해 있었다. 운동화 앞코에서 네 발자국 정도 떨어진 그즈음에 시선이 머무르고 있었다.


나는 여자의 등장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우리 동네에 저런 사람이 있었다고? 당장에라도 달려가 말을 걸어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안녕하세요, 정말 멋있으세요. 이 말을 꼭 하고 싶었어요. 저도 당신 같은 분위기를 뿜어내고 싶어요. 앞으로도 우리 남의 시선 따위는 생각하지 말고 그렇게 삽시다. 이렇게만 삽시다. 하지만, 나는 기어이 그녀에게 말을 걸지 못했다. 버스에 올라타면서도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했다. 우리는 친해질 수 있었을까. 세상의 모든 무례함을 논하며, 알지 못한 것을 궁금해하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하며, 그렇게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인물이 되었을까. 아니면, 연락처는 주고받되 연락은 하지 않는 사이로, 그저 이런 일이 있었다 정도의 에피소드만 남긴 채 묻히는 인연이 되고 말았을까.


버스에 올라타기 전에 그녀가 사라졌었다. 나는 그제야 아쉬워하며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슬며시 온 것처럼이나 갑작스럽게 그녀는 사라졌다. 나는 버스에 올라타면서 생각했다. 영화에 나오는 어떤 장면처럼, 분명히, 내가 버스 창가에 앉아가는 동안 밖을 걸어가는 그녀를 마주할 것이다,라고. 그리고, 그렇게 되었다. 그녀는 친구로 보이는 누군가와 나란히 걷고 있었고 여전히 버스를 바라보지 않았다. 내가 그녀에게서 느낀 묘함은 무엇이었을까. 시선은 줄곧 바닥을 향했지만, 곧게 뻗은 것처럼이나 다름없던 그녀의 아우라. 나는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는 사실이 오히려 다행스러웠다. 그녀를 바라봄으로써 나의 마음에 일어났던 어떤 파동은 내가 충분히 안고 가며, 나를 가꾸는 데 사용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것이면 되었다. 인연이면 어디선가 또 한 번 보겠지. 이렇듯, 살면서 후회하거나 미련을 가지게 되는 순간은 늘 오는 것 같다. 내가 다른 선택을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어떤 상황은 영영 오지 않을 것처럼 온다. 시치미 뚝 떼고 다가오는 그런 순간은 우리로 하여금 다양한 선택을 하도록 둔다. 어떤 것이 좋은 선택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다만, 우리는 딱 한 가지의 선택만을 할 수 있고, 어떠한 선택을 하건 간에 약간의 후회와 미련을 얻는다. 아무리 기억에 남는 순간을 마주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점점 빛을 잃는다. 잊을 수도 있고, 간혹 어렴풋이 떠올릴 수도 있다. 나는 자주 잊고, 자주 잃는다. 이러한 행위는 그 순간과 함께 오는 어떤 '얻는' 것과 동시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나는 항상 '0'이 되는 느낌이다. 마이너스도 아니고, 플러스도 아닌. 


어떤 것은 도중에 잃을 것을 안다. 어떤 것은 조금 있으면 기억에서 사라질 것을 안다. 어떤 것은 알아채지도 못하게 사라지곤 한다. 나는 이왕이면 잘 잃고, 잘 잊었으면 좋겠다. 그것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든, 문득 다시 떠올리게 되었을 때 당황하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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