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살아가는 동안, 이렇게 그냥 가만히 흘러가며 버틸 예정이다. 이렇게 적고 보니, 정말 대단한 목표를 세운 것 같은 비장한 얼굴과는 달리 바람이 아주 소박하게 느껴져 기분이 좋다. 지금은 밖에서 촉촉하게 내리는 빗소리가 들린다. 바닥 장판을 자박자박 걸으면서 다니는 강아지의 발소리, 그리고 내가 글을 쓰는 동안 내 손끝에서 울리는 타자기 소리. 마시려고 떠 놓은 물이 찰랑거리는 것이나 아까 켜놓은 캔들에서 아직 생생하게 풍겨오는 이름 모를 향이 내 주변을 맴돈다.
읽을 것이 많다는 생각을 하면, 일이 많이 밀린 사람처럼 마음이 급해진다. 단숨에 읽어버리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라 책을 다 읽기 전까지 설레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함이 좋다. 자기 전에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한 곡 들으면서 잘 것이라는 작은 계획만으로도 벌써 하루를 제대로 마무리하는 듯한 마음이 들어서 행복하다. 거창하게 살아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나에게는 아주 행복한 일이다. 지금은 아주 작은 것들을, 조그마한 것들을 챙기면서, 그러면서 나도 챙기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내가 제대로 존재할 수 있는 이유일 듯하다.
가끔 산책을 한다. 노래를 들으면서 걷는 날도 있고, 아예 아무것도 듣지 않고 자연의 소리를 들으며 걸을 때도 있다. 그런 경우에는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이 나누는 한 마디의 말을 듣게 된다. 나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혼자 걷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둘 혹은 셋이서 짝을 지어 걷는 이들도 많기 때문이다. 상대의 보폭에 맞춰 걸음을 걷는 사람들을 보면 신기하다. 나도 물론 누군가의 보폭을 맞춰 걸었던 적이 있다. 분명히 상대방도 나의 보폭에 맞춰 걸었던 적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느려지고,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기억하기에, 그때의 그 순간이 아주 선명하게 남는 것이 아닐까.
걷고 있는데, 앞에서부터 남자와 여자가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남자는 여자에게 영어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는 영어를 잘하지 못하지만, 어느 정도는 알아들을 수 있었으므로, 남자가 여자에게 어떤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알았다. 프렌드, 패밀리, 마이 라이프. 대충 들어보았을 때(제대로 들을 수 있다면 더 좋았겠지만), 남자는 여자에게 자신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을 설명하고 있는 듯했다. 어쩌면, 자신의 삶을 이루는 몇 가지의 요소를 말하고 있었을지도. 여자는 외국 사람이었는데, 조그맣게 리액션하며 남자의 말을 찬찬히 들어주었다.
남자는 또박또박 자신의 말을 전달했다. 말이 느렸기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둘 다 오랫동안 이 순간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싶었기 때문인지 걸음이 느렸다. 그래서, 그들이 나를 지나쳐가는 오랜 순간동안 조금 더 많은 단어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러다가 나에게 닿은 문장은 딱 하나였다. '아캔컨츄롤마이라이프', 남자는 이 부분에서 아주 목소리를 높였다. 아캔컨츄롤마이라이프를 남긴 남자와 여자는 나를 스쳐 지나가고, 나는 그 자리에 잠시 멈춰서 가만히 바람을 맞았다.
나는 나의 인생을 조절할 수 있다. 나는 나의 인생을 조종할 수 있다. 나는 나의 인생을 꾸릴 수 있다, 등 여러 가지로 해석이 가능한 그 문장은 정말이지, 아캔컨츄롤마이라이프 그 자체로 나에게 남았다. 나는 그 문장을 외치는 남자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그가 적어도 울고 있진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어 괜히 웃음이 나왔다. 나의 인생을 내가 잘 알아서 꾸려나갈 수 있다고 자신 있게 외치는 자의 얼굴은 어떨까? 나는 그 얼굴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세상이 유한하고, 내가 무한할지도 모른다. 유한이나 무한 같은 단어를 여러 번 쓰다 보니, 이젠 유한이 무한 같고 무한이 유한 같다.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유한하거나 무한하거나 둘 중 어느 하나는 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하다. 무엇이 되든지 간에 상관없다. 나는 그저 나이고 싶다. 자기 전에 마음으로 한 번 외쳐보고 자려고 한다. 아캔컨츄롤마이라이프. 당신도 마찬가지로 외쳐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