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끔 생각한다. 과연 나는 나 자신에게 어떤 순간을 마련해 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단순하게 생각할 수 있는 문제이기도 하고, 어렵게 생각한다면, 아주 어려운 문제가 될 수도 있는 사안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한 번쯤 생각해 보았을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순간은 무엇일까, 그 순간을 나는 나에게 선물할 수 있을까? 하는.
글을 쓰기 전에 나는 배우를 꿈꿨던 적이 있다. 자신의 감정을 충분히 발산하면서, 몸을 유연하게 움직이는 배우들의 연기는 나를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감정을 잘 다스리고, 어떨 때는 극대화시켜야 하는 그 모든 부분들이 무섭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했던 것 같다. 내가 아닌 나로 살아가는 것, 그러면서, 내가 경험하지 못할 무언가를 경험하기도 하고, 결코 내가 될 수 없는 무언가가 되기도 하면서, 하나의 삶을 살아가는 동시에 여러 사람이 되어보는 경험을 나는 간절히 바랐던 것 같다.
그 꿈을 접은 후에는 글을 썼다. 글을 쓸 때, 제일 먼저 했던 생각은 나의 글이 누군가에게 방문을 열고 나갈, 혹은 책을 한 장 넘기게 할, 밥 숟가락을 들게 할, 옷을 갈아입게 할, 샤워할 수 있도록 보일러 온수를 조절할 아주 약간의 혹은 아주 큰 힘을 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위로가 되는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고, 그렇다고 번지르르한 말을 남기기에 나는 위로를 그럴싸하게 잘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서, 나는 그저 나의 이야기를 썼다. 내가 생각하는 것을 썼고, 절대 부풀리거나 사치스럽게 포장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다양한 분들에게 글을 잘 읽었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대부분의 평은 자신도 그런 생각을 해보았기 때문에, 글이 잘 읽혔다는 평이었다. 나는 그것보다 좋은 평은 또 없다고 생각했다. 열심히 써낸 어떤 문장이, 누군가의 손에서 밑줄로 든든히 받쳐지는 순간을 그리면서, 나는 또 한 번 내가 원하는 순간을 상상하곤 했다.
내가 원하는 순간은 단연, 글이라는 분야 안에서 좋은 책을 내고 많은 이들이 나의 책을 읽는 것이겠다. 그리고, 책을 읽으면서 글을 쓰는 그 하나의 일에만 집중하고 싶고, 그렇게 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늘 했다. 그것은 내가 나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꾸준히 노력하고, 꾸준히 무언가를 해내려고 움직이기만 한다면 잘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러나, 정작 내가 나에게 선물 받고 싶은 순간은 따로 있었다. 나는 그것을 얼마 전에 알았다.
가끔 비가 내리거나 천둥과 번개가 몰아칠 때 나는 이상하게도 아늑함을 느낀다.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 그리고 바람에 휘둘리는 모든 나무와 바깥의 소리에도 나는 덤덤하다. 오히려 아늑하다. 이러한 마음을 느끼는 이들이 꽤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나는 그런 순간에 집에 있다는 것이 나의 공간에 있다는 것이, 무척이나 고맙다. 그것에 안도한다. 아늑함을 느낀다.
나는 그런 아늑함을 나에게 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여겼다. 그러니까, 최근 들어 내가 나에게 받고 싶었던 어떤 순간은 '가만히 혼자 있는 시간'이었던 것이다. 나는 가만히 있으면 지극히 혼자일 수 있다. 하지만, 여태 가만히 있지 않고 남을 위해 에너지를 쓰거나 시간을 보내는 일을 잦게 해냈다. 그러고 나니, 혼자일 수 없었던 여러 시간 때문에 오히려 체력이 떨어지거나 생각이 더 많아지고, 스트레스를 받게 되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나는 나를 가끔 가만히 내버려 둠으로써 내가 자연스럽게 다시 일어날 힘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미처 몰랐던 것이다.
누군가는 그렇게 말할 수 있겠다. 나가서 사람들을 만나거나, 운동을 하면 더 활동적이게 되면서 마음도 가벼워지고 좋을 텐데, 왜 그렇게 혼자 틀어박혀 있으려고 하냐고. 그러면, 나는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에너지를 비축하는 중이라고 포장할 수 있겠지만……, 나는 종일 입을 열지 않고도 정말 많은 이야기를 생각하고, 쓸 수 있는 사람이기에 그렇게 하고 싶을 뿐이랍니다,라고.
그렇다. 누군가는 모임을 만들어 밖에 나가 사람들에게서 에너지를 얻는 것이 좋겠지만, 나는 모든 것이 익숙한 집에서(내가 제일 무서워하는 정전이라는 사태가 일어나더라도 거뜬히 생활할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하다), 읽고 싶은 책을 읽고, 가끔은 멍하게 있고, 물을 마시고, 낙서하며 지내는 모든 상황들이 나를 살게 한다고 믿는다.
세상에 속하기 위해서 세상과 잠시 거리를 둔다. 가끔은 뭘 하지 않는 게 최선이라는 것을 절실하게 느낄 때가 있다. 생각하는 것에는 돈이 들지 않으며, 나는 이 생각으로 어디든 갈 수 있다. 나를 회복할 수 있다. 글을 쓰는 일은 남에게 보여주지 못할 나의 패를 쉽게 보이는 일 중에 하나라고 들은 적이 있는데……. 그런 패를 자꾸 생성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나를 가만히 두고 채울 여유가 필요하다. 나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