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을 계약하고 내가 처음 한 일은 이케아에서 나온 노란색 1인용 소파를 구하는 일이었다. 이케아 스트란드몬 윙체어. 방에 맞춰 가구를 고르는 것이 아니라 그 의자에 맞춰 방을 구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왜 방을 보자마자 그 의자 생각이 났을까. 난 이 의자를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것일까. 가만히 기억을 더듬어보니 20년도 더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처음 이케아 매장에 가 보았던 건 유럽 여행 중 네덜란드에서였다.
지금의 남편이 남자친구였을 때 함께 유럽여행을 했었다. 그 여행은 내가 이 방을 구했을 때만큼이나 급작스럽게 결정된 것이었다. 그 당시 나는 직장을 다니고 있었는데 월급의 절반을 부모님께 생활비로 드리면서도 따로 5년짜리 적금을 들고 있었다. 내 꿈의 파리 여행을 위해. 5년 동안 돈을 모으며 유럽여행을 꿈꿔왔지만, 집안 형편상 만기를 앞둔 적금은 내 결혼자금으로 써야 할 상황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예정되어 있던 결혼이 미뤄지게 되었고, 나는 적금으로 힘들게 모은 목돈이 생활비로 공중 분해 되기 전에 의미 있게 쓰고 싶었다. 만기일이 다가오자 그 돈으로 유럽행 비행기 티켓을 끊어야겠다 결심했다. 은행에서 찾은 돈의 절반은 엄마에게 드린 후, 혼자 갈까 남자친구를 데려갈까 백 번쯤 고민하다가 취준생 백수였던 남자친구의 비행기 티켓도 함께 끊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인맥을 끌어모아서 해외에서 공부 중인 지인들의 거처에서 숙식을 해결하기로 계획을 짰다.(그때 우리를 먹이고 재워준 친구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를) 무려 한 달 동안 영국,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스위스를 여행했는데 그중 네덜란드에는 암스테르담 대학에서 공부 중인 남자친구의 이모(늦둥이로 태어나 우리와 세 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가 있었다.
한국을 떠나 처음 도착한 곳은 영국 런던이었다. 늦은 밤 공항에 도착해 전철로 이동하는데, 낯선 도시의 어두운 밤거리는 무섭기까지 해서 어서 안전하고 밝은 숙소로 가고 싶었다. 하지만 어둑한 거리를 지나 처음 들어선 숙소의 조명이 거리의 가로등만큼이나 어두워서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밤새 환한 하얀빛의 형광등을 켜고 지내는 한국에서만 살아오다 온통 노란 조명만을 쓰면서, 그마저도 더 은은하게 간접등으로 비추는 유럽의 문화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날이 밝아 이국땅의 풍경이나 사물을 인지하기도 전에, 그 밤 빛의 차이만으로도 내가 완전히 다른 세계에 와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영국에서 프랑스로 건너가 머물게 된 지인의 집은 오래된 6층 건물의 꼭대기 층이었다. 복층 계단이 있는 좁은 원룸이었는데, 그 방에서 넷이서 일주일 동안 요리도 해 먹고, 와인도 마시며 수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노란 불빛 아래에서. 영국보다 더 어둡고 노란 그 방이 이제는 낯설거나 어둡게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친구들과 밤새 와인을 기울이며 이야기 나누던 그날의 온기의 빛깔로 기억된다. 파리의 노란 옥탑방.
네덜란드에 도착하자 남자친구의 이모는 고국에서 온 우리를 진심으로 반겨줬다. 오랜 타지 생활로 외로움에 지쳐 있었기에. 매일 장을 봐서 한국 음식을 해 먹고, 촛불을 켜둔 작은 탁자 앞에 모여 와인을 마시며 밤새 이야기를 나눴다. 이모의 네덜란드인 친구 부모님이 식사 초대를 해주셔서 그 집을 방문한 적도 있었는데, 그곳의 조도는 이모의 방보다 훨씬 더 어두웠다. 탁자 군데군데 놓인 촛불과 간접등만이 저녁 식사 자리를 밝혀주었다. 어둠과 은은한 빛 속에서는 묘하게도 서로의 목소리에 더 깊이 귀 기울이게 되었다. 유럽의 다른 나라들보다 네덜란드에서는 촛불을 더 많이 켜고 지냈던 것 같다. 따뜻한 느낌의 목재 가구와 컬러풀한 패브릭 소품이 어우러져 공간에 온기를 더해주었고, 깊은 어둠과 함께 환한 빛으로 춤추는 촛불이 그곳을 채우고 있었다. 우리는 낮에는 종일 미술관과 박물관을 다니며 거리를 걷다가 저녁이면 집으로 돌아와 따뜻한 그 노란빛 아래에서 밤늦도록 진솔한 대화를 나누며 편히 쉬었다. 내일은 뭐 할까 계획 짜는 것으로 긴 대화를 마치곤 했는데 그때 이모가 제안한 것 중 하나가 이케아에 가는 것이었다.
IKEA. 예쁜 DIY 인테리어 가구와 소품이 많기로 유명한 브랜드였는데, 한국에도 이케아 물품을 수입해서 파는 업체가 더러 있었지만 정식 매장은 생기기 전이었다. 이케아 매장에 처음 가서 쇼룸을 보고 깜짝 놀랐다. 너무 예뻐서. 단순히 인테리어 소품이나 가구를 진열해 놓고 파는 매장이 아니라, 그 물건을 실생활에서 어떻게 배치하고 방을 꾸미면 좋을지 콘셉트별로 방을 꾸며 전시하고 있었다. 그 전시된 모든 제품을 판매하는 이케아 매장의 쇼룸. 그곳에서 나는 노란색 커버의 스트란드몬 윙체어를 만났다. 매장의 모든 가구들은 직접 앉거나 누워 볼 수 있었는데, 그때 나를 받아주던 1인 소파의 포근함이 너무 좋았다. 초대받아 갔던 집 소파도 이렇게 몸을 푹 파묻을 수 있는 패브릭 소파였다. 노란빛 아래에서 편안한 윙체어에 앉아 서로의 목소리에 집중하거나 휴식을 취하는 유럽 사람들처럼, 나도 언젠가는 이런 의자를 나의 방에 놓고 편안히 쉴 수 있길 바랐다. 내가 꿈꾸던 나만의 방. 이제 노란 의자를 구해다 작업실 방 한가운데 놓고 보니, 이십여 년 전에 꿈꾸던 그 방을 지금에서야 만들었구나 싶다. 프랑스 파리의 옥탑방을 떠올리게 하는 나의 노란 방. 이제 이 의자에 앉아서 나는 무엇이든 꿈꾸고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