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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양선 Nov 17. 2023

그녀만의 가위바위보 방식

조기교육의 중요성

    나의 (2023년 11월 기준) 만 4세 조카는 지는 것을 싫어한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첫 번째 사례는 다음과 같다. 조카의 어린이집 하원길, 둘이 나란히 하천을 쏜살같이 달리다가 걸어오느라 뒤쳐진 언니를 기다릴 겸 하천에서 길가로 이어지는 계단에서 가위바위보 게임으로 이기면 한 칸씩 올라가는 게임을 시작했다."가위~바위~보!"라고 말하며 내가 가위를 내면, 조카는 1초의 텀을 두고 머리로 핑핑 계산한 후 주먹을 낸다. 이건 무조건 내가 질 수밖에 없는 게임이다. 하지만 나는 기꺼이 져준다. 어른들의 세계에선 통용되기 어려운 '눈에 빤히 보이는 수'를 엄청난 패인 것처럼 생각하는 그녀의 천진난만함에 내 마음이 정화되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사례는 퍼즐 놀이를 하면서 생긴 일이다. "이모는 이거 해 나는 이거 할게"라고 역할을 지정해 주며 본인은 더 쉬운 퍼즐을 천연덕스럽게 선택한다. 내 앞에 놓인 퍼즐은 12조각 조카 앞에 놓인 퍼즐은 6조각. 그리고 그녀는 아마도 똑같은 퍼즐을 수십 번은 반복했을 숙련자일 것이다. 얼마나 숙달이 되었는지 나는 여러 번 속수무책으로 지는 척이 아니라, 실제로 패배했다. 사회에서 나는 대개 기울어진 운동장을 보면 분개해 왔다. 5살 생명체는 나에게 오늘도 나의 다른 면모를 가르쳐준다. 아, 내가 기울어진 운동장 앞에서 만면에 미소를 머금을 수 있는 사람이었구나.

조카는 이미 퍼즐조각을 뒤집어엎고 장인과 같은 스피드로 이미 맞추고 있는 동안, 불공평함에 실소가 터진 후 사진을 찍고 있던 나.

    세 번째 사례는 '양말 멀리 던지기 대회' 때 일어난 일이다. 단어에서 느껴지는 바 그대로이다. 양말을 더 멀리 던지는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다. 첫 번째 주자는 형부였고, 형부는 적절하게 승리와 패배를 조합하여 게임을 진행했다. 조카는 이길 때는 뛸 듯이 기뻐하다 질 때는 한 없이 풀이 죽는다. 두 번째 주자는 아빠(조카의 외할아버지)였다. 그런데 정말 황당한 일이 일어났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했던가. 심판을 자처한 형부가, 양말을 던졌을 때 도달하는 도달점에 서서 아빠의 양말 던지기 때만 양말을 마치 탁구공처럼 내치면서 다시 출발점으로 되돌려 보내는 게 아닌가. 지켜보던 나 포함 모든 관중들은 어이가 없어서 실소를 터뜨렸다. 나의 조카만 잔뜩 신이 났다. 이런 불공평한 심판이 있는 대회에 다음 주자로 내가 나섰고, 당연히 나 또한 패배했지만 한껏 고조되어 있는 조카를 바라보자니 괜스레 기분이 좋았다.


    예전에 허지웅 님의 에세이에서 이런 얘기를 본 적이 있다. 혼자서 이룰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거나 가진 게 쥐뿔도 없는 상황에서 180도 상황을 전환하기 위해 가장 중요하게 발을 떼야하는 step이 있다면, '이기는 경험을 쌓는 일'이라는 말이다. 일부 내용을 그대로 옮기면 이러하다.


[형편이 좋은 집에서 태어난 청년들은 이기는 경험을 쌓는 일이 비교적 수월하다. 스스로 형편이 불리하다고 생각한다면 다른 무엇보다 몸이 이기는 경험을 쌓아나가자. 출발선이 다르고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몸을 이기는 경험을 대신 쌓는 것이다. 이기는 경험을 쌓는다는 건 언제 힘을 주고 뺐는지, 언제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는지 근육의 쓰임과 호흡의 감각을 기억해 내는 것과 같다. 지는 것에만 익숙해지면 뭐가 진짜 이기는 거고 지는 건지조차 구분이 어려워진다. 되는 놈만 늘 되는 이유가 그런 것이다. 이겨본 사람만이 다시 이길 수 있고, 지더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 p. 34 허지웅 - 살고 싶다는 농담]


    이 얘기가 갑자기 생각난 이유는, 조카의 '이기는 경험을 쌓는 일'에 대한 조기 학습이 참 보기 좋아서였다. 나중에 살면서 수없이 많은 패배를 맛보고 많이 좌절하기도 하고, 세상이 자신을 등진 것 같은 느낌이 들겠지만, 어렸을 때부터 차곡차곡 쌓여온 승리에 대한 경험이 그녀에게 대단한 버팀목이 되어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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