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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양선 Nov 10. 2023

까먹지 않는 조카

약속을 자키는 것은 상대의 애정에 대한 척도

  조카는 누구보다도 약속에 진심이다. 나 또한 그러하다.


   나는 약속은 가급적 지키려 노력한다. 못 지킬 것 같은 약속은 아예 답을 회피하기도 한다.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이면 적당히 '다음에 밥 한 번 먹자'라는 말 정도는 가볍게 하기 마련인데, 내게는 이 말조차도 때론 무겁게 느껴진다. 그래서 그 말조차도 정말 이행할 생각이 없으면 쉽게 하지 않는다.


   왜 나는 약속을 지키려 하는가. 약속이 깨졌을 때 우린 실망한다. 그게 내가 간절히 바라온 약속이거나 아니면 당연히 이뤄질 것이라고 여겼을 때 그 실망감은 배가 된다. 이런 실망감을 안겨주는 것을 피하고 싶은 마음이 난 더 컸던 것 같다. 약속을 깨졌을 때의 부정적인 감정을 상대에게 안겨주고 싶지 않은 마음. 물론 이것도 아예 나쁜 마음은 아니다. 하지만 아이의 접근 방식은 좀 더 단순할 수밖에 없다. 아이에겐 약속이란 개념은 오히려 낯설다. 그냥 누군가 좋으면 무언가를 해주겠다고 편하게 말하고, 그것을 그대로 지킨다. 상대에게 그게 알려지든 알려지지 않든 크게 상관없이 말이다.


   조카와 나는 주로 아침에 영상통화를 한다. 나는 서울에 살고 조카는 천안에 살기 때문에 자주 보지 못하는 아쉬운 마음을 현대 문명의 힘을 빌려 달래는 것이다. 2022년 어린이집 여름방학의 어느 날 이른 아침, 조카에게 영상통화가 걸려왔다. 집에서 언니랑 간단한 베이킹 시간을 가질 예정인 모양이었다. 한껏 신나 있었다. (사실 대부분의 경우 조카는 텐션이 높다.) 집에서 엄마와 쿠키를 만드는 모양이었다. 내가 물었다. 


   "ㅇㅇ이는 무슨 쿠키 만들 거예요?"

   "어~ 자동차 쿠키, 신호등 쿠키, 물고기 모양 쿠키, 눈사람 모양 쿠키 만들 거예요. 눈사람 모양 쿠키는 이모한테 줄게요" 


   기분 좋은 대화가 오고 가고, 나는 전화를 끊고 바삐 출근 준비를 한 후 회사에 출근해서 일을 시작했다. 그러다 언니에게 카톡이 왔다.


언니에게 온 '쿠키 완성본' 인증샷

   언니가 보내준 사진에 눈사람 쿠키가 있길래 조카가 한 말이 생각나서 장난 삼아 눈사람모양 쿠키는 나 주는 거냐고 언니에게 물었는데, 진짜 조카가 날 준다고 했다니. 


    뭉클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열심히 만들었을 생각을 하니 괜히 웃음이 나기도 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쿠키를 만들던 어느 여름방학 신난 그녀


   눈사람 모양 쿠키를 내게 주기로 한 것을 잊지 않고 나에게 준다고 빼둔 조카의 행동. 뭉클한 마음 후에 찾아온 생각은, '아, ㅇㅇ이가 나를 정말 좋아하는구나'였다. 


    나는 '내가 말한 것을 지키는 행위'가 상대에 대한 애정의 척도라고 생각한다. 조카는 나에게 약속을 지키는 행동이 상대의 애정에 대한 척도라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어떤 기댓값을 충족시키는 것보단 그냥 내가 좋으니, 그렇게 하는 순수한 어떤 마음. 상대가 설사 나의 약속 이행 여부를 모른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은 것.


   우리는 자주 나에게 집중하기보단 상대에게 집중하게 된다. 상대에게 집중하고 싶은 마음 또한 나의 진심일 수 있다. 하지만 나에게서 출발하는 사고에서 비롯되는 순수한 마음(가령, '나는 이 사람이 좋으니까 이 사람을 위해서 이렇게 해주고 싶으니까 할 거야')은 상대에게 닿았을 때 더 울림이 생기는 것 같다. 그러니 나는 이제 약속을 좀 더 주체적으로 하는 사람이 되겠노라고 결심하고 난 후, 나 또한 다름 아닌 조카와 순수한 마음에서 비롯되는 약속과 이행을 한 적이 과거에 있었던 것이 생각났다.




    조카가 나에게 저 쿠키를 만들어준 시점이 2022년 7월이니까, 그때로부터 약 1년 7개월 전이었다. 조카는 태어난 지 2년도 채 되지 않은 시점에 정말 호되게 아파서 난생처음 병원에 입원해야만 했다. 입원 수속을 밟던 날, 언니가 입원 수속 관련해서 사무적인 일들을 처리하는 동안 나는 조카와 잠시 둘이 있었고, 우리는 병원 복도를 한가롭게 거닐고 있었다.


   그때 첫 번째 줄에 조카가 완전히 빠져있던 '뽀로로와 친구들' 인형들이 병원 복도 전시장 첫 번째 칸에 진열되어 있는 게 우리 둘의 눈에 포착되었다. 내가 먼저 운을 띄었다.


    "ㅇㅇ이는 뽀로로와 친구들 중에 어떤 애를 제일 좋아해?"

    "나는 뽀로로, 그리고 크롱"

    "뽀로로는 알겠는데, 크롱은 누구야?"


병원 복도 진열장 첫 번째 칸에 있던 '뽀로로와 친구들' (jwprist님의 블로그)


    조카는 말없이 진열장의 초록색 악어를 가리켰다. '아, 맞네. 쟤가 크롱이었던 것 같다.' 얼핏 조카에게 이전에도 같은 질문을 물어봤던 것이 머리를 스쳤다.


    "알았어. 그럼 이모가 다음에 ㅇㅇ이 병문안 올 때 둘 다 꼭 사 올게. 뽀로로와 크롱."


    그렇게 약속하고 조카는 그날을 기점으로 입원했고, 나는 주말에 약속한 대로 뽀로로와 크롱 인형을 사들고 조카를 찾아갔다. 서울에서 천안으로 가는 길부터 인형을 살만한 장난감 판매 전문업체인 '토이저러스' 위치를 먼저 검색했다. 병실 방문이 COVID-19로 불가한 상황이라 복도에서 짧게 인사만 하고 헤어지려고 잠깐 들렀는데, 조카는 작은 손에 링거를 꽂은 채로 나를 향해(정확히는 뽀로로와 크롱을 향해) 링거병을 달아놓은 링거걸이가 쓰러질 정도의 빠른 속도로 달려왔다. "이모~!!!"를 외치며. 나는 아주 오래도록 그녀의 입가에 만연했던 미소와 그토록 경쾌한 '이모'라는 외침을 잊지 못할 것이다.


    누군가는 아이와의 스쳐 지나가는 기억도 못할 약속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조카가 좋으니까 조카가 좋아하는 뽀로로와 크롱을 사가야지'라는 생각뿐이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약속은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하자는 부정적인 사고 틀에서 벗어나서, 약속이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한테 기꺼이 나누는 사랑이라고 생각해 보자고. 나도 이제 약속 이행 여부를 '이 약속을 깨트리면 상대가 나한테 실망할 거야'가 아닌, '내가 이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이 충분한가?'의 관점으로 의사결정을 내려야겠다.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아끼며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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