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20분 손글쓰기
발달에서는 항상 산출 능력보다 이해 능력이 더 먼저 성숙한다
- <그림책 페어런팅>, 김세실, 한길사
아이의 첫 걸음을 기다리고 있다. 한달 전쯤 처음으로 세발짝을 뗀 뒤로 눈에 띄게 빨리 걷고, 쪼그려 앉았다 서는 동작을 반복하고 있다. 하지만 손 떼고 혼자 걷는 것은 그 세발짝 뒤로 구경도 못했다. 엄마를 닮아 겁이 많고 조심성이 있어서 그러겠거니 하며 무심히 기다리고 있다.
아직도 그날의 장면이 눈 앞에서 생생히 아른거린다. 쿵. 쿵. 쿵. 세 걸음을 걸어 환하게 웃으며 내게 와 폭 안기던 아이의 몸짓과 얼굴이 마치 영화 속 중요 장면의 슬로우 모션처럼 펼쳐졌다. 살면서 그런 시각적 감각을 경험해 본 것은 처음이다. 순간적으로 시간이 느리게 흘러 한 장면을 더 오래 천천히 느끼게 한 시지각적 착각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알 수 없지만 평생 지워지지 않을 나만의 스냅 사진을 한 장 얻은 기분이다.
요즘 아이는 하루 종일 '이거', '이고' 가리키며, 자신이 보고 있는 게 뭔지 묻는다. 그래서 내가 이름을 말해주면,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한다. 꽃, 나무, 풀, 멍멍이, 야옹이처럼 살아있는 것만이 아니라, 빠방이, 미끄럼틀, 에어컨, 세정제, 냄비, 샐러드, 완두콩 등 이름을 알려주는 모든 것들에게 안녕 하고 인사하는 것이 신통방통하고 사랑스럽다. 비록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이거' 뿐이지만, 이제는 아이와 의사소통이 거의 다 된다고 느낄만큼 엄마, 아빠가 하는 말을 거진 다 이해하고 반응할 줄 안다. 때로 남편과 식사시간에 뉴스를 들으며 속시끄러운 소식에 거친 말들을 토해낼 때가 있는데, 이제는 그런 말들도 아이 앞에서 가려야 한다.
이렇게 매일같이 이름만 묻던 녀석이 어느 날 갑자기 장마철 소나기 내리듯, 제 속에 차곡차곡 쌓아온 말들을 쏟아내리라. 그럼 나는 세상 가장 환한 목소리로 반겨줘야지. 살면서 느껴본 가장 행복한 기다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