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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향인 Aug 17. 2023

손으로 쓰는 글_사마귀

얼마 만에 보는 사마귀인가.

유모차 끌고 더운 여름 저녁 한가운데를 거닐다 문득 마주친 사마귀.


오래된 아파트의 담벼락 너머에는 줄지어 서있는 대파, 옥수수, 호박과 이름 모르는 채소들이 질긴 더위에 풀이 죽은 모양새로 바짝 말라있다.


여름내 무성해진 풀과 나무, 이름 모를 노란 꽃, 보라 꽃 사이를 지나다 바짝 갈라진 나무껍질 위를 사마귀가 기어오르는 것이 흐리멍덩한 내 시야에 선명히 들어온다.


사마귀의 색이 저리 예쁜 연녹색이었던가. 참 곱다.

늠름한 갈퀴며 툭 튀어나온 두 눈이, 나 정말 보기 드물게 잘 생긴 사마귀요, 하는 것 같다.


보는 것만으로도 예뻐 기특해하고 있는데, 이 녀석이 아주 독특한 리듬으로 몸을 움직여 나무껍질 위를 올라가는 것이 아닌가.


그 경쾌하고 가벼운, 마치 춤사위 같은 리드미컬한 움직임이 내게 뭔가를 말하려는 것 같다. 휴대폰 영상으로 찍어 아이에게 잠시 보여주며, “이것 봐. 너무 신기하지? 이게 사마귀라는 거야.” 하는데 저녁나절 졸음이 오기 시작한 아이는 눈을 비비며 별 흥미가 없다.


아이를 재우고 집안일을 마치고, 넷플렉스로 아무 예능이나 틀어놓고 잠시 멍하니 시선만 두다가 TV를 껐다. 오늘은 자기 전에 꼭 스트레칭을 해야지 낮동안 몇 번을 되뇌었지만, 늘 그렇듯 그럴만한 의지와 기력이 남아있지 않다. 그렇다고 이대로 자기는 아쉬운데 어쩐지 책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내일로 향하는 잠으로 빠져드는 깊은 밤, 일찍 잠에 드는 것이 현명하겠으나, 해소되지 않은 뭔가가 끈적이게 의식을 붙잡는다.


그리고 무언가에 홀린 듯 자연스럽게 노트와 펜을 들고 소파에 비스듬히 앉았다. 지금 내 정신과 몸은 바로 지금 이 자세, 소파에 기대 비스듬히 누운 것도, 앉은 것도 아닌 자세와 꼭 닮았다.


잔잔한 무기력과 얕은 한숨 같은 허탈감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시간. 초여름부터 세 달간 준비해 온 일이 사소한 불찰로 갑작스럽게 중단되고 나니 몸도 마음도 잠시 앓는 것 같다. 한참 달리고 있는데 뒤에서 누가 확 붙잡아 자리에 주저앉힌 느낌이 이리 끈적이며 불쾌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구나, 오랜만에 경험하는 좌절감이 모순적이게도 잠자고 있던 내 영혼을 깨우고 있다.


그렇게 깨어난 눈으로 처음 알아본 것이 사마귀였나 보다. 둠칫 둠칫 리듬 타는 사마귀가, 나 좀 보고 웃어볼래요? 하는 것 같다.


둠칫 둠칫 사마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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