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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회전문가 Oct 02. 2024

말하기. 말(제대로)하기

어릴 때부터 아기를 좋아했다. 터질 듯한 볼살과 맑은 눈동자. 똑 떼어가고 싶은 작은 코와 침으로 반들반들한 입술. 단풍잎 같은 손과 한 뼘도 안 되는 발바닥을 가진 아기라는 생명체는 바라만 봐도 귀엽고 인류애가 충전되는 기분이다. 그래서 아기를 가진 지인들을 만날 땐 늘 아기 사진을 보여달라고 했고, 친한 언니가 출산을 한 후에는 언니 집에 종종 놀러 가 하루종일 아기를 놀아주었다.


이런 나를 보며 주변 사람들은 "나중에 네가 아기를 낳으면 만 배는 더 예뻐."라고 말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속으로 만 배가 가능할까? 싶었는데, 낳고 보니 정말 만 배 이상으로 내 새끼가 제일 예쁘게 보인다. 얼마나 예쁜지 다른 애기들이 안 예뻐 보일 정도라 한참 열심히 보던 아기 유튜버를 안 보게 되는 지경이다. 

 

그런데 이런 나를 사로잡은 [남의] 아기가 있다. 그는 바로 충청도 베이비로 불리는 요즘 핫한 유튜브 스타 태하다. 올해로 만 3세인 이 아기는 매력은 인생 2회차 같은 언어실력이다. 그는 날씨가 춥다고 자신을 안고 카페로 가라며 원하는 바를 명확하게 얘기하거나, 낮잠 자기 싫은 본인의 마음을 존중해 달라고 말한다. 어쩜 그렇게 말을 청산유수로 예쁘게 하는지 봐도 봐도 신기해서 계속 보다가 빠져버렸다. 


태하의 영상을 볼 땐 마음이 편해지는데, 그건 태하의 귀여움과 별도로 느껴지는 분위기 때문인 듯하다. 사랑을 잔뜩 받고 자라는 게 영상에서도 느껴질뿐더러 주고받는 말들이 참 예쁘다. 그래서 그런가 영상에는 항상 태하의 부모님을 칭찬하는 댓글들이 가득하다. 


그런 걸 보면 눈이 도록도록 굴러간다. 내 말투를 배울 우리 아기가 떠올라서. 잘못한 게 없지만 벌써 잘못을 저지른 기분이랄까. 우리 아기도 얼마 전부터 어른들의 말을 곧잘 따라 하기 시작했다. 내가 멍멍! 하면 머머! 하고 음메~하면 으메~한다. '엄마'소리는 얼마나 또박또박하는지 가끔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엄마. 하고 부르면 나도 모르게 당황해서 웃음이 터진다. 


이런 하얀 도화지 같은 아기에게 내 말투라니! 상상할수록 끔찍하다. 물론 아이 앞에서 비속어는 절대 쓰지 않지만 그것을 제외하더라도 내 말투는.... 흠... 객관적으로 말하면 좀 까칠하다. 말 끝을 올리는 습관 때문에 남편은 종종 내가 화를 낸다고 오해하기도 하고, 언젠가 지인에게 왜 따지듯이 말하냐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결정적으로, 얼마 전 아기를 찍은 영상을 돌려보다가 충격을 받았다. 내 목소리가 생각보다 톤이 높은 건 둘째치고 지나치게 앵앵 거리는 게 아닌가. 게다가 말투는 공격적인데 끝말은 흐릿하고 전반적으로 발음이 뭉개져 오래 듣기 힘들 정도였다.  


그동안 이렇게 말하고 다녔다니. 절로 눈이 찌푸려지며 아득한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모든 것은 말투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하는 고민이 들어서. 내 것이 아닌 내 목소리를 들으며 그동안의 삶을 곱씹어볼 정도로 한동안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만약 지난날의 어긋난 관계들과 사건들이 말투 때문이라면? 이 이유가 100%는 아니겠지만 0%도 아닌 것은 확실했다.  


그렇다면 고쳐야만 한다. 오래 생각할 것도 없이 결론이 내려졌다. 우리 아기가 내 말투를 배울 테니까. 말투를 바꾸지 못하면 과거의 내 슬픔은 아기의 슬픔이 될 수도 있으니까. 쉽지 않겠지만, 어쩌면 오랜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지만 반드시 꼭 해내야 하기에 이곳에 적으며 되새겨본다. 


발음은 또박또박, 말끝은 흐리지 말고, 속도는 너무 빠르지 않게. 직설적이고 공격적인 단어는 최대한 속으로 삼키고, 톤을 낮춰서 조곤조곤 말하기. 상대방을 지칭할 때 야, 너, 말고 이름이나 애칭으로 부르기. 한숨 자주 쉬지 않기. 예쁘게 말하는 게 어렵다면 최소한 웃으면서 말하기. 

말, 제대로 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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