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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회전문가 Aug 07. 2024

나는 피해 갈 줄 알았지 산. 후. 탈. 모.

그리고 각종 피로와 통증과 수면부족...

머리카락이 너무 많이 빠지고 있다. 출산 후에는 호르몬 작용으로 산후탈모가 온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어느 정도 각오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샤워가 끝나면 수챗구멍은 매번 막히고, 물기를 닦은 몸엔 머리카락이 더덕더덕 붙어있어 바디로션을 바를 때마다 때처럼 밀린다. 그런데도 머리를 말리면 또 한가득. 분명 샤워할 때 잔뜩 흘려보냈던 것 같은데 이 뭉텅이는 뭐지. 뭉텅이를 쥐고 쓰레기통을 향해 걸어가는 와중에도 머리카락은 쉼 없이 빠지고, 나는 이삭을 줍는 여인이 되어 하릴없이 바닥을 훑는다. 뒤돌면 한 가닥. 한 가닥을 줍고 고개를 들면 또 한 가닥. 이렇게 빠지는데 아직 대머리가 아니라니. 대단하다 대단해.


게다가 삭신은 왜 이렇게 쑤신 건지. 아이를 간신히 재우고 침대에 누우면 목, 어깨, 손목, 팔꿈치, 골반, 무릎, 발목 어디 하나 소외되지 않고 사이좋게 아프다. 주사기를 무서워해 몸이 아파와도 최대한 자연치유를 하겠다며 버티던 과거는 전생처럼 느껴질 만큼 수시로 병원에 가 수액을 맞는다. 조금이라도 아프거나 컨디션이 떨어지면 육아가 몇 배로 힘들어지니까. 조금이라도 아플 기미가 보이면 헐레벌떡 병원에 달려가 말한다. "선생님, 비급여라도 상관없으니 놔줄 수 있는 거 다 놔주세요...."


다른 덴 몰라도 위랑 장만큼은 누구보다 튼튼해 엽떡과 마라탕을 일주일에 두세 번씩 조져도 끄떡없던 나였지만 이젠 덜 매운맛, 1단계 기본 맛을 고른다. 그마저도 정말 참지 못하는 날에만 가아아끔 먹는다. 이 역시 자의가 아니다. 모유 수유가 끝났다며 신나게 마라탕 3단계를 먹고 밤새 화장실을 들락거리다 아침을 맞이한 날을 기점으로 무슨 짓을 해도 끊을 수 없던 매운 음식러버인생이 강제종료되었다. 더불어 역류성식도염도 강화되어 야식도 함께 안녕. 스트레스를 해소하기에 매운 걸 먹는 것만큼 빠르고 확실한 게 없었는데... 이제는 다른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체력은 점점 떨어지고 피로는 쌓여 없어지지 않는다. 아기가 잘 때 같이 자야 한다고들 하는데,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요. 애기 잘 때 젖병도 삶고 빨래도 하고 바닥 닦고 밥 먹으면 아기가 깨는 게 현실. 그럼 또 놀아주다가 기저귀 갈아주고 밥 먹이고 트름 시키면 하루가 다 끝나있다. 그러면서도 정말 휴식 시간이 주어지면 핸드폰으로 아기에 관한 것을 검색하기 바쁘다. '4개월 아기 놀이', '유아 발달 장난감', '문센 시작 시기', '치아 나는 시기', '분유 핫딜', '밤 기저귀 추천'. 코로나로 조리원 동기를 만들 수 없었던 데다 평소에도 사교적이지 않은 나는 모든 정보를 인터넷으로 배우느라 정신이 없다.


출산 전에는 이런 건 생각도 못하고 안일하게 아기 자면 그때 책 읽어야지~라고 생각했었다. 피부관리 받으러 가기, 마사지 받으러 가기, 오전 운동 다니기, 친구들과 여행 가기 뭐 그런  것들. 쉽게는 아니어도 조금만 부지런 떨면 다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개뿔. 아무리 부지런을 떨어봐도 시간은 나지 않는다. 병원 갈 시간도 간신히 쪼개서 가는 마당에 무슨. 어쩌다 운 좋게 시간이 나는 날도 있지만 그런 날은 자야 한다. 자지 않으면 아기에게 웃어줄 수 없으니까. 그러니 이불속으로 들어가 생각한다. 지금 잠들면 2시간은 잘 수 있어. 하지만 내일은 진짜 운동 갈 거야.


나는 피해 갈 줄 알았다. 산후탈모, 산후풍, 산후우울, 산후로 시작되는 모든 안 좋은 감정들과 각종 질병들. 도대체 무슨 자신감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그렇게 생각했다. 어째서?  

어째서긴. 젊음을 너무 믿은 탓이지. 내가 영원히 어리고 건강할 줄 알고. 청춘은 너무 짧고 한시적인 걸 잊고 말이다. 언제쯤 다시 삶이 여유로워지는 걸까 궁금하다. 아기가 유치원에 가면? 초등학생이 되면? 그때가 되면 나는 완전한 중년이 되어있을 텐데 그때도 피부관리와 오전 운동과 친구들과의 여행을 꿈꾸고 있을까. 내 삶을 다시 되찾기를 원할까. 아니면 너무 오랫동안 함께였기에 혼자가 되는 것에 외로움을 느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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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생각들을 하며 조금 울적해하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어차피 아이가 없어도 늙는 건 똑같지 않나?

지금이 너무 힘드니까 꼭 자식이 나의 젊음을 먹고 자라는 것 같은데, 사실을 따져보자면 그냥 난 당연히 - 자연의 이치에 따라 - 늙어가는 것뿐이다. 물론 자식을 낳고 안 낳고에 따라 몸의 피로도나 노화의 가속도가 달라지기야 하겠지만 어찌 됐든 한 번은 경험해야 할 노화의 일인데, 이걸 너무 아이 탓을 하는 거 아닌가. 어쩌면 난 아이로 인해 얻어지는 것보다 잃는 것에 더 초점을 두고 있는 게 아닐까. 아이로 인해 얻는 행복은 당연하게 여기고서.


산후탈모로 빠진 머리카락은 아이가 200일이 넘어갈 즈음 다시 난다고 한다. 정말로 아이가 11개월이 된 지금, 나는 잔디인형처럼 새머리가 삐죽삐죽 솟아있다. 빠진 근육은 운동으로 다시 붙이면 된다. 50세에 보디빌더가 된 여성도 있는 걸. 위장이 약해졌으니 이제 건강한 음식만 먹으면서 몸관리 하자. 그러면 난 새 머리도 나고, 운동도 꾸준히 하게 되고, 식단도 깨끗해지는 거니 아이 덕에 건강해지는 거다.


그리고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자. 아이가 없을 때 과연 내가 부지런했는가? 피부관리를, 운동을, 독서를, 친구들과의 여행을 잘했는가? 아이가 없었더라면 난 더 게으르고 잘 웃지도 않고 대충대충 엉망진창으로 살다가 더 팍삭 늙었을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남는 게 없는 상태로.

 

모든 일은 일장일단이다. 그 사실을 잊지 말고 산후우울을 잘 부셔보자. 이까짓 거. 별 거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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