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인형 뽑기와 같다.
난 자칭 타칭 인형 뽑기의 달인이다.
인형 뽑기 경력만 20년!
그동안 뽑아온 인형만 수도 없이 많다.
얼마 전 나의 인형 뽑기 경력에 또 신기록을 경신했다.
무려... 딱 2천 원으로 두 판 플레이해서 두 판 모두 나온 것이다!
친구에게 실력을 보여주겠다며, 호기롭게 천 원을 넣었다.
“이건 원래 한판에는 잘 안 나오고 밑작업이란 걸 해야 해! 저 끝에 있는 인형을 먼저 입구 쪽에 이동만 시킬게”
그런데 운이 좋았는지 한방에 나와버렸다.
난 떨떠름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아니 이게 왜 한방에 나오지?...”
친구는 내가 인형을 잘 뽑는다는 건 알았지만, 한방에 뽑을 줄은 몰랐다며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난 다음 판은 안 나올게 분명했기에 그냥 가면 재미없으니 천 원을 더 넣었다.
근데 이게 뭔가? 또 너무 쉽게 나와버렸다.
“아니 이럴 리가 없는데 왜 이래 재미없게!!!”
친구는 내가 두 번 연속 성공한 것보다 내 반응이 더 웃기다며 연신 감탄했다.
그렇게 한 마리의 루피는 친구에게 강제 분양했다.
친구에게 보여주려 했던 인형 뽑기의 기술은 사실 두어 번의 실패가 성공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몇천 원을 투자해서 일단 입구 쪽에 탑을 쌓은 뒤, 뽑고 싶은 녀석을 그 탑에 걸터져 입구로 떨어뜨리는 기술을 말이다.
이건 오랜 시간 단련된 나의 손맛이라, 글로 설명하기 참 곤란하다.
그러나 요지는 인형 하나를 뽑기 위해 적어도 몇 번의 실패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저렇게 운이 좋을 수도 있지만 20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나는 보통 5-6천 원만 딱 즐기고 가겠다.라는 생각으로 인형 뽑기를 한다.
어쩌면 나는 그 인형을 뽑는 것에 목적을 둔 것이 아닌, 인형 뽑기를 플레이하는 그 행위 자체에 돈을 쓰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인형이 나오든 안 나오든 5천 원의 충분한 재미를 누렸다. 인형에 집착하며 그 이상 투자하면 점점 피폐해진다. 인형원가를 생각하면 터무니없는 짓인 것이다. 멈출 줄 알아야, 제대로 즐길 수 있다.
눈치챘겠지만, 결국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이거다.
실패한 면접들은 성공을 위한 밑작업이 된다.
운이 좋아 한번에 성공하면 좋긴 하겠지만, 재미가 없다.
여기저기 가보고 다양한 면접관을 만나 한 시간 대화를 나눈 그 시간들은 지나고 생각해 보면 더없이 재밌는 경험이다. 그 시간들이 아니라면, 그 사람들과 만날 기회는 없었을 것이다.
실패에 투자한 시간과 돈은 아깝지 않다. 그 실패를 즐기기 위한 대가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실패들이 모여 반드시 성공을 위한 발판이 되어준다.
아니 도전이라고 말하기 그렇다. 반복적 루틴처럼 실패를 경험하는 사람들이 있다.
최선을 다해 준비하지 않은 채 반복적으로 시즌이 되면 공무원 시험 접수를 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물론 운이 좋게 얻어걸릴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력을 다해 준비해서 실패를 맛보았던 사람만이 그다음 판에 인형을 뽑을 수 있다.
의미 없이 반복되는 루틴성 도전은 도전이라기보다는 행위이다. 동전을 넣고 인형은 잡을 생각도 없이 갈고리만 왔다 갔다 하는 뻘짓인 것이다.
진심으로 최선을 다 해보아도 계속 시험에 낙망하는 사람도 있고, 살아생전 그 작품을 끝내 인정 못 받는 예술가들도 많다.
어쩌면 우리에게는 정말 행운이 필요한 것 같다.
그러나 시험에 떨어졌다고 해서, 작품을 인정받지 못했다고 해서 “성공” 하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 세상적인 기준이다.
크리스천이 기대하는 행운은 세상적인 기준인 성공이 아닌, 더 큰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는 것이다.
응답받지 않은 기도도 응답받은 것이다. 그게 그분의 섭리라면 말이다.
무엇인가 꼭 되지 않아도 도전하는 사람들의 삶은 충분히 눈부시다. 세상적인 성공의 잣대에 나의 성공을 판단해 버리면 안 된다.
인생은 인형 뽑기와 같다. 인형을 뽑는 것이 성공이고 뽑지 못하는 것이 실패라고 이원화시키는 것은 틀렸다.
인형이 나올까 안 나올까 두근두근하는 마음으로 직접 내 손으로 갈고리를 조작하며 그 플레이를 즐기는 것. 여러 도전을 허락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항상 기뻐하는 것. 그것이 진정 성공한 삶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