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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타는지성인 Jun 11. 2023

그렇다고 말할 수 없는 일

해민이 지금 네 집에 가도 돼?라는 문자를 보냈다. 주혜는 짐작할 수 있었다. 1시간 후 해민이 주혜의 집 문을 자연스레 열었다. 주혜는 문을 응시했다. 먹고 있던 아이스크림의 숟가락을 입에 문 채로 가만히 해민을 바라보았다. 주혜는 얼마 전에 산 옷이라며 며칠 전 해민에게 보여준 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 셔츠 어울리네.”

“잘렸어.”

해민이 주혜의 말을 듣지도 못한 채 침대에 그대로 엎어져서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주혜가 기억하기를 세 번째였다. 주혜는 그제서야 아이스크림에 숟가락을 놓고 해민을 봤다. 이럴 때 해민에게 할 말은 무엇일까 주혜 역시 해민의 옆에 누웠다.

“세 번 잘리니까 조금 알 거 같아.”

“어떤 건데”

“내가 좁밥이라는 거.”     

2년 전 졸업을 한 해민이 이력서를 내기 시작했다. 주혜는 이미 적당한 곳에 지원하여 경영관리팀에서 일했다. 주혜에 할당된 업무는 처음과 달리 점점 많아져서 관련 업무로 공부가 뒷받침되어야 했다. 주혜는 차근차근 공부와 업무를 병행하며 삶의 중요한 순간들을 그려갔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회사가 망했다. 회사가 망한 날 주혜는 해민에게 이렇게 말했다.

괜찮아 실업급여 타면서 준비할 수 있어라고. 주혜에게 실업급여기간은 휴식 같은 시간이었다. 처음 몇 주간은 특별한 일이 없었고 집에서 아이스크림만 먹었다. 아이스크림을 먹으면 스트레스가 풀렸다. 그중 어떤 아이스크림을 좋아하는지도 알게 되었다. 스크류바, 죠스바 같은 바 종류보다 붕어싸만코였다. 얼마나 좋았는지 밥 대신 먹을 정도였다. 그렇게 2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주혜와는 달리 해민은 네 번째 취업을 준비해야 했다.     

해민은 세 번의 권고사직을 받았다. 그러나 실업급여를 모두 탈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회사에서는 각각의 실업급여를 탈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해민은 그때마다 해결할 수 없는 회사 밖에서도 아무것도 못 할 것이라는 무력감을 느낀다고 주혜에게 말했다. 그래서 이번에도 받았을 충격을 누구보다 잘 알 수 있었다. 

“그게 네가 왜 좁밥이라는 거야, 한국의 열악한 사회 속 구조적 인력 시스템의 문제지.”

주혜는 해민이 슬픔이 보였다. 그런 상황에서도 주혜는 해민의 코가 유난히 예뻐 보였다. 점이 두 개 정도, 어쩔 땐 세 개인데, 그건 주혜만 아는 해민의 비밀이었다. 해민이 말없이 천장을 보고 있었다. 주혜는 해민에게 바람 좀 쐐자고 말했다.     

한낮의 동네 거리는 이제는 주혜에게 익숙한 풍경이 되었다. 회사에 다니지 않더라도 돈이 나오는 곳이 있어서인지 한적함을 거닐 수 있었다. 물론 지금의 이런 상황이 언젠간 끝날 거라는 것이 조금은 아쉽고 조금은 빨리 끝내고 싶었다. 이를테면 평일에 어쩔 수 없이 느껴지는 외로움이었다. 퇴근길 지하철에서 보는 한강이 좋았다. 해지는 한강을 보면 이유 없이 좋았다. 좋은데 이유는 없다고 한참 동안 해민이 따라다닌 남자가 생각났다. 결국 좋은데 이유는 필요하다고 해민이 말하면서 그 일은 끝이 났다.

주혜와 해민은 벤치에 앉았다. 벤치에 앉아 있으면 가만히 세상은 돌고 있다. 각자의 이유로 각자의 목적으로, 각자의 방향과 속도로. 그렇게 가만히 보고 있으면 좋은 일도 없고 안 좋은 일도 구별되지 않는다. 구별할 수도 없었다. 그런 일이 생겨났고, 그런 일들이 일어났음을, 개미는 땅을 유영하고 나무는 바람에 일렁인다. 자동차에 사람들은 각각의 목적지를 향해 움직이는데 어디를 가는지는 알 수가 없다. 설령 안다고 해도 자신과 상관없는 일들이라는 것을 안다. 누군가의 실종 문자가 주혜와 해민의 폰에 차례대로 울렸다. 

“수현이 걔 있잖아. 결혼하고 나서 연락이 없어.”

“뭐.. 서울도 아니니까.”

“카톡이라도 주지. 전화도 걸면 바쁘다고 안 받고.”

주혜와 해민은 한참을 침묵했다. 다시 바람, 자동차, 개미, 흔들리는 깃발등이 차례대로 흘러갔다. 

“지금이 만약 영화야. 우리가 감독이면서 주인공인 영화가 진행되고 있는 거지. 그럼 뭘 해보고 싶어?”

주혜가 물었다.

“남자화장실에 휴지걸이를 없앨 거야. 나 힘들게 한 김 부장, 이 팀장말이야 똥싸개거든.”

“그거 재밌겠다. 화장실에 들어갈 땐 분명히 있어야 하는데 볼 일을 보고 나선 없어야 해. 오잉? 왜 없어졌지?”

“너무 현실적이진 않은데 b급 코미디 영화느낌?”

“오 나 b급 코미디 좋아”

“오랜만에 넷플로 영화 볼까?”

영화를 보기 위한 세팅은 간단했다. 맥주와 간단한 과자를 세팅하고 방의 불을 끈다. 커튼을 친다. 맥주 캔을 딸 때는 최대한 큰 소리를 냈다. 스트레스가 풀리는 행동이었다. 해민의 전화가 울렸다. 해민은 면접 전화야라고 말하며 폰을 뒤집었다. 그리고 지금은 이딴 전화를 받는 것보다 영화를 보는 게 인생이야라고 덧붙여 말했다.     

영화에선 두 여자가 영화를 보고 있었고 영화 속의 영화엔 눈이 내리고 있었다. 눈은 소복이 조용하게 온 세상을 뒤덮고 있었다. 주혜는 영화의 개연성이 아쉬웠다고 말했다. 그 장면은 무엇인지 해민은 알 수 있었다. 남자가 여자에게 화를 내며 이별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말하는 장면이었다. 주혜는 그 장면에서 왜 화를 내는지 모르겠고, 오히려 여자가 화를 내는 게 맞지 않냐고 말했다. 해민은 주혜의 비슷한 상황을 예전에 들었다. 화가 나는 포인트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주혜는 영화를 보면 글을 남기곤 했다. 이번 영화는 화가 나기 때문에 더 잘 쓸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영화가 끝났을 때는 해가 지고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업무로 지친 퇴근길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저무는 하루를 아쉬워하며 집으로 가야 하는 시간이었다. 해민은 이제 집에 갈 거라고 주혜에게 말했다. 주혜는 해민과 함께 저녁까지 먹고 싶었지만, 해민이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것 같았다.     

주혜는 해민이 집에 가는 뒷모습을 떠올렸다. 힘내라는 말 한마디를 건네고 싶었다. 카톡을 보내려다가 말았다. 기프티콘을 보낼까 생각도 했었다. 그러나 보내지 않았다. 해민이 집에 도착할 시간 즈음, 주혜는 해민에게서 오늘 고마웠다고 말하며 힘내와 기프티콘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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