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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운 Oct 08. 2023

어쩌면 보통의 우리



아얏이라는 비명소리와 손에는 붉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여기에 어울리는 생각은 아니지만 문득 든 생각은 피가 흐르는 우리는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이었다. 그 후에야 나는 상황을 파악하고 휴지를 가지러 자리에 일어났다. 평소에는 어디에도 있던 휴지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서둘러 화장실에 있는 휴지를 가져왔다. 바닥에 피가 많이 흘러져 있었는데 휴지를 찾은 건지 해지는 손에 휴지를 대고 있었다. 이건 내가 닦을 테니까 일단 지혈부터 해야겠어 해지씨.


우체국이 열리면 오전 내로 기부자들에게 한 해를 마무리하며 감사 인사가 담긴 초대장 5,000장을 보내야 했다.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해지씨와 나 이렇게 두 명이서 봉투에 초대장을 넣고 밀봉하고 주소지를 붙이는 작업까지 하고 있었다. 어쩌죠? 피가 안 멈추는 것 같아요.


지혈이 원래 잘 안되는지 아니면 피곤해서였는지, 피는 멈출 생각 없이 계속해서 핏물이 휴지를 붉게 만들었다. 해지씨는 당황스러운 얼굴로 아님 애처로운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사무실에 붕대라던지 연고가 있을 리 없었고 나 또한 그런 것들을 가지고 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은 지혈이었다. 상처 부분을 심장 위로 올리고 휴지로 꽉 막고 있으면 어느 정도 된다고 하니까 그렇게 해요.


그러자 해지씨는 곧바로 내 말에 따라 몸을 바꿨는데 그럼에도 휴지를 계속해서 써야 했다. 얼마큼이나 깊게 베인 것인진 몰라도 초대장의 재질이 일반종이보다 더 고급스러우니 빳빳한 종이날에 자신의 살을 베였다고 생각하니 나 또한 소름이 끼쳤다. 시간을 보니 새벽 3시였다.

해지씨는 조금 쉬고 오는 게 좋겠어요. 일단 제가 할 수 있는 대로 할 테니까 쉬고 오세요.


초대장 발주가 많이 늦어서 업체의 발송도 늦어졌다. 이건 업체도 나도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다. 결과적으론 우리의 실수였고, 놓친 부분이었으니 작업이 늦어진 업체를 탓할 수 없었다. 아니 오히려 업체에게 고마워해야 했다. 초대장을 받아서 오전까지 보낸다면 그나마 늦지는 않으니까. 초대장 도착 시간을 맞추려면 오늘 우체국이 오픈하면 바로 보내야 했다. 그런데 사무실에 투입될 수 있는 인원이 겨우 2명이었다는 것에서 나는 체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도 많이 늦어? 저녁 8시쯤 온 카톡을 이제야 봤다. 새벽 3시에.

지금 많이 늦는다고 답변을 하기 애매했다. 왜 나는 지금 미주의 카톡을 본 것일까. 그리고 낮에 중요함을 어필했던 메시지도 이제야 확인했다.      

사무실 직원분들께 요청드립니다. 다들 바쁘신 건 알지만 초대장이 저녁 8시에 사무실로 옵니다. 내일 저희가 오전까지는 초대장을 보내야 하니, 내일은 원래 출근시간보다 더 빨리 도착해서 초대장 작업을 지원해 주시기 바랍니다.

기혁 드림.     


머릿속엔 온통 초대장이었다. 저녁 8시쯤 초대장이 사무실에 도착했고, 나는 초대장을 지원해 줄 수 있는 직원을 요청했지만, 모든 직원이 현장에 나가 있었다. 한 명도 남는 인원이 없었기 때문에 다른 것을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그러니 새벽동안은 내가 책임져야 했다. 적어도 오전에는 검수하고 보낼 수 있는 정도로 마쳐야 했다.

직원 중 유일하게 남은 한 명은 해지씨였다. 신입사원은 주로 18시에 바로 퇴근했지만 오늘은 남아달라고 했다. 아무도 없었다면 5,000장을 새벽동안 혼자 작업해야 했다.

뽑아 놓은 주소지와 봉투가 세팅이 되어 있는 테이블에서 진행되었고, 해지씨는 봉투에 초대장을 넣고 나는 봉투를 붙이고, 주소지를 붙이는 속도가 예상보다는 빨라서 생각보다는 빨리 끝날 것 같았다. 해지씨가 초대장에 손이 베이기까지.


나는 두 명이서 하던 걸 혼자 하기 시작했고, 1개를 완성하는 작업시간은 자연스레 길어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시간은 새벽 4시가 되었다.

초대장이 사무실에 오기 전, 보냈던 회사 단체 카톡방에 남긴 요청은 외롭게 떠 있었고,

숫자는 모두 없어져 있었다. 그래도 곧 직원들이 온다는 희망으로 서둘러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해지씨에게 카톡을 남겼다. 해지씨 마무리된 것 같으니까 집에 가고 오늘은 쉬어요. 대표님껜 말씀드릴게요. 고생했어요.


아침이 되고 직원들이 한 명씩 오면서 초대장작업을 마무리할 수 있었고, 30분 정도 눈을 감았지만 잠이 들진 않았다. 그리고 우체국에 보내면 되었다. 그리고 또 내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미주에게 답장을 하는 일이었다. 어제부터 계속 밤새 작업하다가 새벽 3시에 카톡 온 걸 봤어. 일어나면 연락 줘.     

이걸로 됐다 싶었는데 오늘 날짜가 12월 4일이라는 게 순간 눈에 들어왔다. 나는 허탈한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3년간 한 번도 빠지지 않았던 미주의 생일을 지나쳤던 것에서, 그리고 미주가 내게 아무 말 없이 그냥 있었다는 점에서 말이다. 물론 내가 아는 미주는 괜찮다고 할 것이다. 이 전에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고, 비슷한 결론으로 우리는 비슷하게 지냈다. 미주는 어제 가족과 함께 생일을 보냈다고 했다. 몇 년간 다닌 직장을 그만두고 올해 여름 이직을 한 미주는 일보단 삶을 선택했다. 그 당시 미주는 누구보다 힘들어했고, 일에서 사람에서 모두 지친 채로 살았기 때문에, 나는 그 어려웠던 순간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봤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미주의 회복을 기다렸다. 미주의 집에는 먹다 남은 와인이 있었다. 언제 개봉한 지 써놓은 날짜에는 11.4라고 적혀 있었다. 겨우 한 달 전에 서로 다른 이해를 통해 알아갔다는 것을 알기 시작했으나 더 알기 위해선 상처가 된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너는 나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다고 생각해? 꼭 얼마큼의 수치로 알아야 되는 거야? 그런 기준이 있어? 적어도 서로가 이해할 수 있을 만큼은 알고 있어야지. 우리가 서로 이해를 하지 못하는 이유는 분명했다. 자신이 가진 것을 조금도 내줄 수 없다는 그 마음이 커져만 갔다. 잘못된 건 아니었다. 우리는 지난 1년 동안 서로 더 오랫동안 만날 수 없는 사이임을 확인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정답이 없을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나를 이해 못 하는 건 뭔데?


싸움의 크기는 누군가 화를 내면서부터 상대의 감정과 비슷하게 계속해서 높이를 맞춰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감정의 크기가 커지면 커질수록 그것이 꼭 해결을 위한 방법이라고 착각하게 만들었다. 실제로는 제대로 된 판단력과 이성을 놓친 채로. 이번 질문이 그랬다. 해결하는 척하는 질문. 실제로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위한 질문이었다. 그만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지금 대화? 아니면 우리?     


처음부터 나왔을 결론의 마지막 대사. 영화 속 한 장면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예상은 하고 있었던 것이지만 실제로 들으니까 가슴속 어딘가 마음이 아팠다. 미주는 짜증을 내면 나왔던 습관처럼 눈썹을 찡그리며 우리라고 말했고, 나는 미주가 짜증을 낼 때마다 주름이 잡히는 눈썹 사이를 신경 썼지만, 이제는 멀게만 느껴지는 표정이 낯설어 보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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