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의 세계안에 존재하는 기생충 , 영화

어디에나 있는 계급의 부조리

by 성운

선과 악을 구분해야되나 싶었다. 분명 타인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자신의 이득을 취하니까 들었던 생각이었다. 그러나 곧 무너졌다. 선과 악의 경계가 모호했다. 애초에 선이 없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러면 악인가 싶었다. 그것도 아니었다.

결국 이런 생각들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들의 삶과 태도에 대해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각자 놓여진 세계가 있었다. 그 세계는 견고했고, 크고 넓었기 때문에, 서로 충돌할 일이 없었다.

세계는 각자의 세계 안의 법과 질서, 환경을 통해 살아가지만, 세계와 세계가 충돌하게되면 마치 전쟁이라도 하듯, 한 세계의 법과 질서를 송두리째 바꿔버렸다.

선과악이라는 개념 아래, 어떤 기준으로 삶의 태도를 유지하며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애매한 생각이 들어서인지 영화를 본 이 후에도 마치 몸에 기생충이라도 있는 것처럼 무기력해졌다.

인터넷에 한참 떠돌던 짤하나가 있었다. 선거 때마다 서민 코스프레에 열 올리는 모습, 관심이 없다가 그제서야 한 번쯤은 얼굴을 들이미는 그러니까 그런 척 해야하는 대표적인 장소가 전통시장이었다.

그런 굴레를 깬 한 명의 정치인이 있었다. 과감하게도 고시원을 선택했던 그는 어떤 정치인보다 거짓이 없는 표정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고시원을 처음 본 사람의 표정은 모두 그와 같을거라고 본다. 나 역시 그랬을거라고 보니까.


이렇게 잘 보여준다

다른 세계와 세계가 만나는 순간은.


사람 한 명 겨우 누울 수 있는 크기, 팔을 뻗으면 바로 닿는 양 쪽의 벽, 옆 방에 바로 누군가 있을 것 같은 얇은 벽들 속에 숨을 쉬고 있는 것도 들릴까봐 조용해야 하는 그런 공간에서도 적응이 되면서 잘 살게 되었다.

처음엔 불편했던 공간도, 맞춤형으로 살게 되면서 나름대로의 환경에 적응하며 살았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이 곳보다 좋은 환경을 계속해서 생각했고 결국 나는 고시원을 나왔다.

그 뒤로 나는 고시원을 다시 들어가지 못한다. 가질 수 있고 놓을 수 있는 공간이 너무나 좁기 때문이다.


영화 기생충은 불편하고 부끄러운 마음의 단계를 잘 나타내었다.

처음엔 놀라움, 당혹감을 가지지만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 후엔 적응과 만족을, 그리고 더 나아가게 되면 자신이었던 과거와 닿지 않으려 안간힘을 쓴다.


반지하에 사는 가족이 있었다

대화거리는 주로 그 안에 갇힌 삶에 대한 것들이었고, 약간은 티격태격하지만 그들만의 생활에 만족하며 사는듯했다. 하지만 더 잘 살기 위한 보이지 않는 욕망은 늘 존재했다.

능력이 갖춰지지 않은 채 학력을 속이고, 경력과 직업, 그리고 사람과 사람의 신용을 이용하여 남의 자리를 빼앗고, 더 나아가 그들의 부자집도 탐내었다.

한 방을 노려 인생을 역전하는 것, 그것이 비록 비현실적일지는 모르나, 그만큼 달콤한 상상은 없다고 생각한다.


멋진 정원을 가진 유명한 건축가가 지은 집에 사는 가족이 있었다.

언제나 딸과 아들의 삶이 우선이었고, 개인주의적이면서 약간은 위선적인 삶을 사는 부자였다.

어느날, 과외 선생님이 바뀌면서 자신들과 함께 하던 사람을 쫓아내고 새로운 사람을 집에 들였다.

그들이 믿은 건 내가 좋아하는 급이 맞는 사람이었다.

믿을 만한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이 내게도 좋을 사람일 가능성, 급이 맞을 사람일 가능성이 높으니까.


몇 년째 가정부를 하던 여인의 남편은 부자집 지하비밀공간에 살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삶을 연명하는 시간을 이어갔다. 그는 외부 세계에서 존재하지 않아야 할, 존재하면 안되는 인물이었다.

완전한 기생을 보여주는 존재, 하나의 숙주에 다른 기생은 공생할 수 없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 하는 존재였다.


결국 만나지 않을 것 같은 세 개의 세계가 충돌했을 때

모든 걸 파괴한 세계는 비밀공간이었다.


현실적인 반지하와 부자집이 아닌 비현실적인 지하공간의 세계를 보았다.

누군가에 기생을 성공 하기 위해선 그 누군가는 기생의 존재를 몰라야 했고, 알게 된다면 기존의 기생을 파괴시켜야 한다.

같은 급으로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며 공생했던 것과는 달리 공생할 수 없는 세계는 이토록 비극적이고, 참담한 불편함을 준다.

어쩌면 그걸 알기 때문에 외면하고, 모르는 척 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많은 사람들은 지금도 서로의 이익이 되는 선에서 공생하며 살아가고 있다.

반지하에서 사는 사람이 정원이 있는 부자집을 꿈꾸는 것의 잘못은 없다.

잘 살고 싶어하는 욕망은 누구에게나 있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니까.


영화 속 나의 선악이 무너졌다.

살아 남기 위해서 공생할 수 없는 관계가 있었고, 그들이 협력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 세계는 견고하고, 크고 넓다. 서로 충돌할 일 없이 그대로 살아간다면 행복을 유지했을 것이다.


행복은 나눌수록 커진다고 한다.

그 말은 같은 세계를 공유하는 존재만을 한정짓고,

공생보다는 기생을 말하는 듯 하다.


우리의 세계는 어떤 행복을 위해 어떤 세계와 공생하고 있나.

동시에 어떤 세계에 기생하고 있나.

기생하는 과정 속에 충돌은 없었나.

아니면 그 과정 속에서 어떤 세계를 파괴시켰나.

파괴 당하며 살아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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