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을 차렸을 땐 나는 아버지의 품에 안겨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그때 나의 기억으로는..
고백하자면 그게 내 가족의 마지막 기억이 되었다. 아버지는 연신 내게 괜찮다 춘애야 괜찮다 춘애야 라고 말했다.
몇 살이었으려나. 시간이 흘러서 그것이 1950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때서야 내 가족 전부를 잃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나는 그때 내 삶의 모든 눈물을 쏟아냈다. 이후 혼자 남은 나는 어떤 일이든 해야 했다. 삶에서 주어진 것이라고는 없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다가 첫 번째 남편인 태주 씨를 만났다.
태주 씨는 당시 흔하지 않던 장신이었다. 나는 키가 작았기 때문에 태주 씨를 보고 있으면 왠지 그는 내 가족들을 쉽게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처음으로 나는 태주 씨와의 결혼을 통해 이제는 삶이 그리 싫지 않았지만 태주 씨는 한 번의 교통사고로 죽게 되었다.
나는 가족을 모두 잃었을 때 모든 눈물을 흘려보낸 줄 알았지만 또 한 번의 눈물을 흘려야 했다. 다시 생각했다. 이 삶이 내게 준 것은 하나도 없다고.
혹시나 해서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를 신청해 봤지만 내게 가족을 찾는 기적은 없었다. 그때서야 비로소 나는 혼자임을 깨달았다. 이제는 달라져야 했다. 공장에 다니게 되면서, 낮과 밤이 바뀌고 밤과 낮이 헷갈릴 때쯤, 꿈과 현실이 모호해져 감을 느낄 때 고열이 나서 독감이라 생각했고, 정신을 잃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병원이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그 후로 며칠을 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정신이 들었을 땐 나는 몸 상태보다 돈 걱정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보다 더 슬픈 소식은 내가 당뇨병이 있다는 결과였다.
병원의 냄새가 무뎌져 가고, 한 명의 죽음이, 한 명의 회복이 반복되는 것을 볼 때 자꾸만 어릴 적의 기억이 떠올라 삶을 계속 시작하고 싶은 용기가 생기곤 했다. 잊힌 기억이야 돌아올 수는 없겠지만 이제야 기억을 만들어가는 재미에 빠졌다. 국어학습소를 다니며 일기를 쓰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거기선 경자라는 동갑내기가 있는데 나를 보고 자꾸만 언니라고 하는 바람에, 처음엔 내가 나이가 더 많은 줄로만 알았는데 따지고 보면 경자는 내게 언니였다.
요즘은 꿈을 자주 꾼다. 얼굴도 기억이 나지 않는 언니가 나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우리 춘애라고 말한다. 나는 나를 닮은 언니를 보며 언니의 눈동자에 비친 내 모습을 본다. 언니와 나는 어느덧 늙어 버렸고, 나이를 잊은 채로 우리는 서로 콩국수 한 그릇을 나눠 먹었다. 그러고 나서 힘이 없어진 손으로 물을 마시려고 컵을 들었는데 그만 놓쳐버렸다.
쨍그랑.
유리컵이 깨지는 소리가 났고, 나는 잠에서 깼다. 언제 저런 곳에 두었더라. 저기서 컵을 치우는 저 사람은 내 엄마인가? 나는 엄마를 부른다. 엄마는 유리컵을 치우다 말고 내게 와서 노래를 틀어준다. 노래는 내가 자주 들었다는 좋아한다는 미련이었다.
내 마음이 가는 그곳에
너무나도 그리운 사람
갈 수 없는 먼 곳이기에
그리움만 더하는 사람
엄마.. 그런데 나는 이 노래 처음 들어. 엄마가 나를 보고 자꾸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