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처음 혼술이란 것을 한다. 이따금 마음이 답답할 때 혼자 저녁을 먹으며 술을 먹어보고 싶었다. 그날은 꼭 술을 먹어야 했다. 평소와 다름없던 아침, 서랍을 열고 정리를 하던 게 시작이었다. 생각하지도 못한 타이밍에 그의 팬티가 보인 것이다. 팬티를 두 손으로 펼치고 멍하니 초점을 잃은 두 눈으로 그의 팬티를 봤다. 서랍 속 갈 길이 없던 그의 팬티는 차곡차곡 쌓여가던 속옷들 틈 사이 서랍 안 쪽 깊숙한 곳에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녀는 왠지 갈 길을 잃은 자신의 처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는 그와 보낸 시간을 생각했다. 아주 잘 만난 건 아니지만 특별히 힘들지도 않았던 시간이었다. 생각해 보면 너무 평탄해서 이 평탄함을 이어서 결혼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 팬티의 색은 검은색이다. 알록달록한 팬티가 아니라 검은색. 그래서 그런가, 그와의 만남도 지금 생각하면 검은색인 것 같이 느껴졌다.
여자는 혼술을 하면서 가장 편한 B와의 수다가 그리웠다. 다만 청승스러운 이 밤을 누군가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B에게 어느 날 서랍에 그의 팬티가 나왔노라, 그 팬티가 검은색이었는데 알록달록한 화려한 팬티였으면 그런 생각을 한 날에 처음으로 혼술을 한 적이 있다고 말하면 B는 뭐라 말할지 궁금해졌다. B도 이런 적이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혼자 먹는 술은 쓰기도 했지만, 동시에 달콤했다. 여자는 딱히 취미는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공부도 열심히 하는 것 같고, 취미활동도 있는 것 같은데. 딱히 그런 것에는 관심이 가지 않았다. 볼만한 유튜브 채널이 나올 때까지 새로고침을 계속했지만 나오지 않았고 결국 그만두게 되었다. 알고리즘이 자신을 너무 모른다는 생각을 여자는 하게 되었다. 이런 내 감정을 모르는 알고리즘을 보며 버려진 시간을 생각하면 미래의 기술 따위는 기대가 되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가장 잘 아는 사람이라 생각했던 사람은 다름 아닌 검은색 팬티였다. 그만한 사람이 없었지라는 생각이 들었고 정신 차리자 김민희라는 혼잣말과 함께 침대에 누웠다. 잠깐 눈을 감는데 세상이 핑핑 도는 듯 빙글빙글 세상이 도는 것만 같았다. 여자는 아주 어린 시절 놀이터에서 빙빙 도는 놀이기구를 떠올리며 놀이터에서 빙빙 도는 어린 시절의 나, 술을 먹어 침대에 누워 빙글빙글 도는 나, 우주 속 아직 유일한 생명이 살고 있는 돌고 있는 지구, 우주의 소용돌이를 떠올리면서 검은색을 떠올렸다. 그리고 우주의 끝엔 그의 팬티가 공중에서 돌고 있었다.
돌고 있는 팬티를 손으로 잡자 멈췄다. 여자는 팬티를 버리고 싶어졌다. 아무 쓸모없이 마음만 소란스럽게 만드는 해괴망측한 팬티를 당장 버려야 직성이 풀릴 것만 같았다. 여자는 대충 옷을 입고 밖을 나섰다. 헌옷수거함에 넣기만 하면 모든 것이 끝이다. 모든 것은 이 팬티로 시작된 것이었다. 그러자 그때였다.
"잠깐만,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까지 아무렇지 않게 지내다가 이렇게 불쑥, 맘대로, 예전이라 변한 게 없네. 너는."
팬티가 말을 걸었다. 아니 그일까란 생각을 여자는 했다. 주위를 둘러봐도 아무도 없었으니 분명히 팬티뿐이었다.
"생각해 보면 너도 너무해. 미친놈 아니야? 갑자기 이런 게 어딨어? 차라리 남들처럼 평범하게 밤중에 자니?라는 카톡이나 하던가. 팬티가 된 거야?"
"맞아 나는 팬티가 되었어. 너희 집에 놔둔 칫솔은 보자마자 버릴 것 같았고 면도기 역시 버릴 것 같았지 둘 다 싸구려거든. 그런데 이 팬티는 아니야 꽤 비싼 편이지. 당근에 올려도 꽤 받을 수 있을걸? 남들이 입은 팬티를 사진 않겠지만 2번 정도만 입었다고 하면서 팔아봐. 헌옷수거함에 버리게엔 아깝잖아."
"차라리 칫솔로 변하지 그랬냐. 너는 그렇게 생각했을지 몰라도 지금의 내겐 싸구려인 칫솔이나 면도기나 이 팬티나 쓸모없는 것들이야. 결국 예쁘게 포장하면서 헤어진 거지만 너도 나도 서로에게 쓸모가 없으니까 끝을 낸 거 아니야?"
"그래 버려. 사실 나도 얼마 전에 네 머리핀 버렸어. 혹시 알아? 내가 머리핀을 버려서 팬티가 된 것처럼 너도 머리핀으로 변할지. 이 거지 같은 상황 한번 벗어나보자."
여자는 며칠 동안 찾다가 포기한 머리핀을 생각했다. 그때 당시 별스럽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자주 잃어버렸다. 머리핀, 휴대용 거울, 립스틱 심지어 휴대폰까지 잃어버렸다. 술 때문은 아니었다. 어디든 정신이 팔려 있었다. 다른 생각을 자주 했다. 멍하니 다른 사물에 눈이 더 갔다.
"왜 나는 그때 자주 무언가를 잃어버렸을까?"
"정말 모르는 것 같아?"
"응 알아, 새로운 걸 만들어내니까, 그런데 그게 한 번도 좋지는 않았어. 그런 소중한 물건이 없는 것 같아."
"그럼 이 팬티를 소중하게 여겨보는 건 어때?"
"싫어."
여자는 팬티를 헌옷수거함에 버렸다. 여자는 내일 그의 집에서 머리핀이 되어 있을 지라도 오늘 저녁에 남은 술을 마저 먹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