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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딴따라 Jun 12. 2021

하고 싶은 말을 해야 원귀가 되지 않는다.

나의 첫 독자


사람은 입에 칼자루를 물고 산다.


관계의 나라인 대한민국에서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지 않음은 별종으로 취급받기 딱이다. 어떤 식으로든 연결망이 있어야 사람대접을 받는 사회에서 코로나19는 끈적한 관계에 거리 두기를 만들었다. 인간이 멈출 때 자연이 회복하는 걸 보면 인류에게 최초로 마스크를 씌운 사태는 ‘말하다’ 보다 ‘듣고 보라'는 자연의 지시 같다. 감염의 기준인 37.5도의 발열은 악다구니 쓰는 인간의 열기와 닮았다. 거리의 소음과 사람이 뱉은 뜨거운 말이 떠도는 밤은 마스크 시대 이후 비로소 밤다워졌다.


자신은 '열정'이라고 하지만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화약고 같은 사람이나 '솔직'이라 둘러대고 입바른 말로 상대를 망연자실하게 하는 사람은 모두 칼을 품고 있다. 검 중에 제일 무서운 검이 언검(言劍)이다. 말로 베는 칼은 피가 낭자한 유혈이 아니어도 깊은 내상을 입힌다. 외상이 없어 처벌받기 어렵고 잘 부러지지 않는다. 언검을 입에 문 사람은 자신이 추는 칼춤이 상대를 베다 못해 스스로를 상처 내고 있음을 모른다.


인체는 입과 귀가 동시에 작동되지 못하도록 설계되었다. 말하든지 듣던지 선택해야 한다. 이 신비로운 메커니즘덕에 종일 떠들어대는 사람이 자신도 들을 만큼 들었다는 핑계는 통하지 않는다. 만약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이 나도 들을 건 듣는다며 항변한다면 최소한의 경청으로 최대한의 수다를 보장받으려는 수라는 걸 알아야 한다. 들을 줄 아는 사람은 생명을 구하는 메스와 더도 덜도 아닌 딱 36.5도만큼의 온기를 가지고 있다.



말하면서 이런저런 군살을 붙이다 처음에 하려던 말을 잊고 허둥대는 일이 잦아졌다. 격한 감정을 속사포처럼 쏟아내고선 상대가 기 빨려하는 걸 나중에야 눈치챘다. 노화가 고마운 이유 중엔 건망증 때문에 내가 맞을 거라는 확신을 의심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내가 틀릴지 모른다는 합리적 의구심 때문에 말이 조심스럽다. 말하면서 전에 했던 말임을 깨닫고 상대가 똑같은 얘기를 지루하게 듣고 있음을 알았을 때의 미안함과 생각날 듯 나지 않는 이름 때문에 답답해하다 기죽는 일이 여러 번이다. 그동안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살았으니 이제 해야 할 말만 하고 살라는 순리이다.



최초의 독자


속내를 드러내기 어려운 내성적인 사람은 쓰고 지우기를 반복할 수 있는 문자가 편하다. 자신을 발설하고 수정하며 재창조하는 통로로써 글이 유용하다. 독자를 생각하지 않고 감정이 가는 대로 냅다 휘갈기는 글이 예의에 어긋나지만 나는 일단 쓰라고 하고 싶다. 말을 하고, 궁금한 걸 묻고 때때로 요구하면서 미운 사람을 단죄하고 자신의 억울함을 빽빽이 폭발하는 경험이 필요하다. 실컷 미워하고 욕하며 사랑하고 울어도 좋다. 살고 싶다와 죽고 싶다는 괴리를 오가며 여백에 괴발개발 쓴 글이 읽히지 않는다고 해서 휴지 조각이 아니다. 그 글의 최초의 독자는 자신이며, 가장 성실한 청자이다. 


혼신의 힘으로 쏟아낸 가슴이 비워지고 나면 비로소 자신의 글을 정면으로 마주할 용기가 생긴다. 그러는 동안 차츰 익숙한 타인으로 자신을 볼 여유를 갖을 수 있다. 비뚤어진 감정으로 가슴에 응어리가 생기기 전에 ‘씀’으로써 토해내는 행위, 그 행위가 끝난 뒤 자신을 여물게 하는 게 글이다.


감정의 배설물을 발효시키면 똥이 퇴비가 되듯 좋은 습작이 될 수 있다. 자신처럼 배설의 욕망을 가진 누군가가 '맞아. 그럴 수 있어' 라고 동의한다면 글동무가 된다. 모두가 하고픈 말이 있다. 찌르고 베는 언검을 자제하기 어려우면 차라리 글로 옮겨보자. 살고자 하는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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