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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미치 Jul 04. 2017

음악은 유럽을 흔들고, 유럽은 나를 흔들고 #2

밴드 스위머스 유럽 투어 일지 #2. 하크니 정착




도착 Arrival

우리가 런던 히드로 공항에 도착한 시각은 저녁 8시 30분.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내가 런던에 처음 갔던 것은 2010년, 약 7년 전이다. 그 해는 내 인생에서 손꼽히게 어두운 해였고, 나는 한국에서 도망치듯 유럽에 갔다. 그때 벨기에에서 단짝친구가 유학하고 있었다. 나의 명분은 그 친구를 만나러 가는 것이었다. 귀국 날짜를 정하지 않은 여행이었고, 떠나는 날을 기다리며 남은 날들을 죽여나가던 시기였다.


그때 나는 혼자 다닐 때에도, 친구와 만나 같이 다닐 때에도 매일 일기를 썼다. 어쩌다 그 기록들을 들춰보면, 태어나서 처음 와보는 공간에 압도당해 모든 것이 의아하고, 모든 것이 새롭고, 또 모든 곳에서 내게 익숙한 장소의 그림자를 보던 내가 있다. 나는 바보 같을 정도로 활짝 열려있었고, 내게 홍수처럼 쏟아지는 모든 것에 흠뻑 젖어 휩쓸려갔고, 그것들을 조금이라도 더, 조금이라도 오래 붙잡고 싶은 마음에 가슴이 뛰었다.


그 해에 히드로 공항에 처음 도착했을 때도 밤이었다. 나는 소문으로만 들어서 실제로 존재하는지 아닌지 알 수 없었던 지구 반대편 땅에 처음 발을 디디며, 앨리스가 이상한 나라에 들어서는 순간을 상상했던 것 같다. 지금부터 비현실의 영역에 들어서는 기분으로, 내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면 이 곳은 처음부터 없었던 곳이 될 것 같다는 기분으로.


이번에는 달랐다. 도착하는 순간 나는 돌아왔다고 느꼈다. 어딘가를 떠나온 느낌이 아니라 돌아왔다는 느낌. 사람들이 같은 여행지를 몇 번씩 찾아가는 이유는 집이 아닌 곳에 또 하나의 집을 세우기 위해서인가, 하는 생각을 이제서야 한다. 우리 모두가 때때로 집으로부터 달아나고 싶으니까. 이상하고 낯선 익숙함이었다.


하지만 그런 익숙함이나 안정감과는 별개로, 이번 여정과 과거의 여행은 성격과 목적이 완전히 달랐기 때문에 자세와 마음가짐도 같을 수가 없었다. 마음이 설레거나 들뜨기보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것이 어쩌면 다행이기도 하고, 또 어쩌면 당연했던 것 같기도 하다. 출발하기 전부터 정신적/육체적으로 정말 많이 고생할 것을 각오하고 끝없이 정신을 가다듬었으니까.


놀 생각으로 가는 여행도 친구와 가면 열에 아홉은 사이가 나빠져서 돌아온다는 얘기를 수도 없이 들었다. 노는 것도 아니고 일을 하러 가는 강행군 일정을 꾸리며 나는 머릿속으로 무수한 물음표를 떠올렸다. 나와 멤버들은 서로에 대해 얼마나 아는 사이인가. 그리고 내가 상상한 것 이상으로 힘이 들어 타지에서 몸과 마음에 문제가 생기면 나는 어떤 식으로 대처하게 될까.


나도 모르는 나의 인격을 알게 되고 싶지 않아서 나는 정말 열심히 되뇌었다. 이건 여행이 아니니까. 출장이니까. 프로답게 일하고 오자.



멤버들은 나보다는 조금 더 들뜨지 않았을까. 적어도 도착한 당일만큼은. 평강이는 비행기가 뜨기 직전까지 자기가 정말 영국에 간다는 것을 믿지 못했다고 했다. 결국에는 안 갈 줄 알았다고. 도착해서 지하철을 타고 나서야 비로소 정말 영국이네요. 정말 제가 여기 왔네요, 하는 평강이를 보며, 나도 덩달아 우리가 정말 한국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와 있다는 사실을 실감했던 것 같다.  


우리는 카톡으로 도착 소식을 팀장님께 알리고 지하철을 탔다. 첫날 숙소는 빅토리아 역과 핌리코 역에서 가까운 호스텔이었다. 비행기 도착시각이 늦은 탓에 첫날은 교통이 편한 시내에 숙소를 잡았다. 런던에서 일주일 이상 머물러야 했기 때문에 장기 투숙할 숙소는 시내를 좀 벗어난 지역에 상대적으로 저렴하고 좋은 곳을 예약했고 이튿날에 옮길 예정이었다.


서울과 달리 런던은 지하철에서 와이파이가 안 터진다. 그걸 망각하고 있다가 팀장님과 통신이 안돼서 약간 당황했다. 그래도 어찌어찌 엇갈리지 않고 핌리코 역에 잘 도착해서 약속대로 우리를 마중 나온 팀장님을 만났다.  





첫 숙소와 이사 Astor Victoria and Moving

호스텔 측에서 실수하는 바람에 우리 일행 넷이 쓰기로 했던 4인실에 외부인 한 명이 이미 취침 중이었다. 호스텔 측은 이 방에 침대 3개, 여성용 도미토리에 침대 1개를 빼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탓에 팀장님은 여성용 도미토리에서 따로 주무시고 우리 셋은 낯선 남자 한 명과 방을 나눠 썼다. 나는 낯선 사람도 신경쓰이고 잠자리도 바뀌어서 몇 시간 자지 못하고 새벽부터 깨어나 뜬 눈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는 아침 일찍 숙소를 나갔고 선웅이는 머리를 공들여 만졌다. 처음 만난 도시에 대한 예의 같은 것이었을까. 맛없는 조식을 먹고 우리는 바로 이사를 시작했다.





둘째 날에도 비가 오다 말다 했다. 운이 좋았는지 우리가 이동할 때에는 하늘이 꾸물거리기만 하고 비는 내리지 않았다. 그래도 찌뿌둥하다는 단어는 저 영국 하늘을 위해 생긴 단어 같다는 생각을 했지.



핌리코 역 앞에서. 숙소는 빅토리아역과 핌리코 역 사이에 있었고, 숙소에서 약간 더 가깝고 조금 덜 붐비는 핌리코 역으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멀었다. 사실 무척 가까운 거리인데도 모시고 다녀야 하는 짐들이 너무 많아서 멀게 느껴졌던 것 같기도 하다. 우리는 고작 그 거리를 걸어놓고 역 앞에 도착했다고 잠깐 쉬었다 가자며 멈춰섰다.


그나마 영국과 영어가 익숙한 팀장님과 내가 내내 번갈아가며 길찾기와 길안내를 했다. 보통 여행이었으면 헤매는 것도 재미의 일부라고 생각했을 텐데, 짐이 하도 많다 보니 실수로 헤매거나 돌아가게 될 때면 일행에게 어찌나 미안하던지.



짐들과의 끝없는 전쟁. 짐들은 단순히 무겁기만 한 것이 아니라 비싸기까지 했다. 대충 끌고 다녀야 하는 짐들이 아니라 모시고 다녀야 하는 짐님들... 악기와 장비들 틈에서 허우적대며 다니던 시간들. 






하크니 센트럴 Hackney Central



옮긴 숙소는 우리가 런던에서 가장 오래 머물렀고, 가장 좋아했던 숙소다. 하크니 센트럴 역 코 앞에 있는, 정말로 입구에서 1분 거리밖에 안 되는 곳에 있는 호텔이었다. 하크니는 소호나 트라팔가 광장 같은 시내로부터 약간 떨어져 있는 서쪽 외곽인데, 이 곳을 두고 팀장님은 '힙스터 동네'라고 불렀다. 동네 풍경은 안전한 부촌과는 거리가 멀지만 크고 작은 공연이나 전시를 사랑하는 각종 문화예술인들이 모여드는 동네라고. 우리가 놀러다닐 여유는 없어서 그건 영영 알 수도 누릴 수도 없었지만 관광객으로 붐비지 않고 조용한 동네라는 점, 그리고 마트나 식당, 술집같이 우리에게 필수적인 제반시설이 가까운 거리에 충분히 갖춰져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첫날 묵은 핌리코 역 인근 호스텔의 가장 큰 문제는 팀장님은 지상 4층에, 우리는 지하 1층에 묵어야 했다는 점이었다. 그 호스텔에는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지하 1층도 싫은데 4층까지 짐을 들고 올라갔다 내려와야 했던 팀장님이 많이 괴로워하셨고, 나는 숙소가 지하라는 점이 힘들었다. 웬만하면 군소리 없이 견디고 넘어가기로 결심을 했는데도 지하는 힘들었다. 지하는 유난히 힘드니까. 사실 나는 잠자리를 많이 가리는 편이다. 


게다가 호스텔 측에서 지하가 아닌 방도 있는데 굳이 지하 방을 준 것도 못마땅했다. 우리와 한 방을 쓴 남자도 한국인이었다. 조국을 떠난 아시아 여자는 어쩔 수 없이 사소한 일에도 인종차별을 의심하게 된다. 한국에 있을 때는 또 다른 종류의 차별을 의심하고 의식하며 살지만.



새 숙소는 2층이었다. 엘리베이터도 있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보이는 창문 너머의 풍경은, 넓고 푸른 잔디밭들, 그 위의 아담한 건물들.    




방도 무척 좋았다. 아쉬운 것은 화장실이 침대 바로 앞에 있다는 점, 그리고 부엌이 없다는 점 정도.


내가 잠자리, 화장실, 청결에 까다로운 것을 알만큼 아는 사람들과 함께여서 다행이었다. 누가 내게 까탈스럽다는 말을 하면 안 그런 사람이 어디 있을까 시무룩해지다가도, 돌이켜보면 내가 좀 유난한 것이 맞는 것도 같고. 멤버들이나 팀장님은 모두 나의 이런 면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는 편이었고, 내가 스트레스받는 지점에 대해서 나만큼 까다롭게 굴지 않고 무던하게 넘어가는 사람들이었다. 결국 내가 화장실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2층 침대를 썼다.




짐을 다 풀고 가벼운 몸으로 식사하러 나섰다. 짐이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했다.





하크니에서의 첫 식사는 역에서 가장 가까운 베트남 레스토랑에서 이루어졌다. 처음에는 전적으로 팀장님의 의견을 반영한 선택이었다. 평강이는 쌀국수를 못 먹는다고 밝혔고 나는 딱히 아시안 푸드에 대한 선호가 없었다. 선웅이도 뭐든 괜찮다는 입장이었는데, 팀장님은 아침이 부실했으니 국물 있는 음식을 먹어야겠다고 말하며 베트남 레스토랑을 찾았다. 사실 팀장님이 원래 면류를 좋아하는 것을 난 안다.


하지만 베트남 사람으로 추정되는 사장님과 직원들이 영어를 거의 할 줄 모르는 이 음식점의 메뉴, 품질, 가격에 모두가 반해버렸다. 하크니를 떠날 때까지 나를 제외한 셋은 여기서 거의 1일 1끼를 한 것 같다. 나는 첫날 볶음밥을 먹었고, 근 일주일이 지난 뒤 내가 식사를 제대로 안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애인이 구체적으로 여기에서 볶음밥을 먹으라고 지시했을 때 한번 더 먹었다.



식사를 마친 뒤 우리는 근처에 있는 런던 필즈 공원에 가서 버스킹 연습을 해보기로 했다.






런던 필즈 London Fields



비에 관해서 만큼은 우리에게 운이 따랐다. 비록 하늘은 흐렸지만 숙소에서 런던 필즈까지 장비를 들고 걸어가서, 연습을 하고, 이제 추워서 더 못하겠다는 생각을 할 때까지 비는 오지 않았다. 중간에 잠깐 해가 나기까지 했고 공원에는 사람들이 한가롭게 드러누워 있거나 노는 아이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우리는 다음날부터 있을 시내 버스킹을 대비하기 위해 한갓진 곳에서 예행연습을 할 생각이었다. 런던 필즈는 멋졌다. 서울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거대한 아름드리 나무들이 있는 것도, 이토록 푸른 들판이 도시 한가운데에 펼쳐져 있는 것도. 서울의 어느 장소에서 누렸던 것보다 넓은 개인의 공간과 개인 간 거리를 갖고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 이 곳에서 가장 좋은 것 중 하나였다.


하지만 마냥 좋은 기분만 누리기에는 우리 연주가 생각보다 너무 엉망이었다. 한국의 지하 작업실에서 연습해온 편곡이라 그런지 막상 야외에서 연주하려니 안 어울리는 곡들이 많았고, 그나마도 대체적으로 연습이 미흡한 상태였다. 아무리 예행연습이라고는 하지만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스스로 만족이 안 되는 연주를 선보이고 박수를 받고 있으니 기분이 영 찜찜하고 불편했다.


시내에서 버스킹 할 거면 처음부터 다시 연습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과, 너무 추워서 더 못 있겠다는 생각을 동시에 할 때쯤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리가 짐을 챙겨 숙소에 도착하니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운이 좋았다. 









원래는 잠깐만 쉬었다가 소파에 모여 앉아 회의하고, 편곡 다시 하고, 될 때까지 연습하고 나서 잘 생각이었다. 하지만 조금만 있다가 일어나겠다는 말을 남기고 침대에 쓰러진 나는 영영 일어나지 못했다. 내가 자는 사이 멤버들은 저녁을 챙기러 피자헛에 가서 싸움을 목격하고, 경찰과 마주치고, 피자를 사 오고, 먹고, 두런두런 의논하면서 편곡하고, 스네어를 뭔가 둔탁한 것으로 대체하여 보컬 없이 노래들을 연습했다.


나는 점멸등이 아주 오랜 간격을 두고 껌뻑이듯, 피자 먹으라고 깨우는 소리에 아득하게 정신이 들었다가 금세 다시 잠들고, 회의하는 낮은 말소리를 듣다가 잠들고, 조용한 기타 소리와 리듬 치는 소리에 깨어났다 잠들기를 반복했다. 막연히, 저 소파에 앉아 연습하는 나의 멤버들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과 약간의 놀라움이 뒤섞인 감정이 떠오르고 흩어졌던 기억이 난다.


누군가 잠에서 깰까 봐 조용조용 연습하는 멤버들이 있던 그 조용한 저녁이, 잠에 취한 그때의 나에게 너무나 다정한 풍경으로 사진처럼 뇌리에 남았다. 정말이지 그것 때문에, 나는 투어 내내 멤버들에게 고맙고 미안했다.




나는 다음날 새벽 다섯 시에 깨어났다. 왜 나를 흔들어 깨워서 연습에 동참시키지 않았냐는 물음에 선웅이가 매우 간단하게 대답했다. 피자 먹으라고 깨워도 못 일어나는 사람을 어떻게 깨우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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