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드 스위머스 유럽 투어 일지 #1. 출국
시작이 어디였는지 짚으려 하면 막막하다. 다만 우리가 프로모터 제롬을 만난 것은 2016년 10월, 잔다리 페스타 공연이 끝난 직후였다. 연초에 첫 앨범을 내고 몇 달간 활동하면서도 우리는 갈증을 느끼고 있었다. 조금 더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이 듣고 싶어할 것도 같은데. 그건 우리가 하는 음악에 대한 어떤 자부심이었다. 그때 제롬이 나타났다. 공연이 끝난 뒤 악기를 정리하고 나갈 채비를 하는 내게 한 외국인 남성이 다가와 물었다. 너희 음악이 마음에 들고, 내가 해외 프로모션을 하고 싶다. 누구와 대화하면 되나.
그렇게 해서 이듬해 2월, 우리는 영국 리버풀 사운드 시티로부터 초청장을 받았다. 무려 10주년을 맞이한 락페스티벌이었다. 그러나 이 기쁜 소식에도 사실 우리는 갈등했다. 음악만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없는 많은 음악인들이 그랬을 것이다. 무언가를 포기해야 하고, 누군가에게 폐를 끼쳐야 하고, 무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감각과 불확실성 속에 발을 내디뎌야 하는 그런 상황. 아무리 오랫동안 간절히 바라온 일이여도 기회의 문턱 앞에서 망설이게 될 수도 있는 거구나. 그때 나는 꿈과 현실의 간격, 삶과 생활의 경계, 따위에 대해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우리는, 결국은 발을 내디뎌보는 쪽을 선택했다. 출국까지 3개월이었다. 그때는 그 기간이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다고 생각했다.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우리는 마지막까지 시간에 쫓겼다.
기존에 연주하던 곡들의 매무새를 다듬는 것도 일이었지만 그 와중에 늘 하던 곡만 연주하기 싫다는 욕심으로 신곡을 작업하고, 연습하고, 고치고, 다시 연습하기를 반복했다. 한국에서는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길거리 버스킹이 예정되어 있었다. 겹겹이 쌓인 신스와 기타 사운드가 특징인 우리 음악에서 악기를 다 걷어내고 어쿠스틱 버전을 만들어 연습해야 했다. 쌓는 것보다 빼는 것이 더 어렵다는 클리셰를 한번 더 체험해보는 일이었달까. 단회 공연이 아니다보니 러닝타임별로 최대한 다양한 셋리스트를 짜느라 고심하기도 했다. 또 조금이라도 더 많은 공연장에서 공연하겠다는 목표로 무수한 클럽, 에이전시, 프로모터들에게 연락하고 답신하고 일정 조율하는 날들이 출국 직전까지 이어졌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신곡들은 영국에 가서 연주를 하며 비로소 완성체에 가까워졌고 셋리스트는 한국에서 짜간대로 공연한 날이 거의 없었다. 그래도 공연은, 우리의 체력과 시간이 허락하는 최대한까지 해낸 것 같다.
2017년 5월에는 아주 특별한 장미대선이 있었지. 대통령 선거 개표방송을 연습실에서 태블릿 피씨로 보아야 했던 것도 특별함에 한 몫 했다고 볼 수 있을까.
깊은 밤, 모두가 피곤에 절어 어쿠스틱 편곡을 하던 시간. 멤버 세 명이 모두 생업을 따로 갖고 밴드를 하고 있다 보니 연습시간은 거의 항상 늦은 밤이었다. 웃는게 웃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재미있었어.
출국 전 마지막 공연, 그러니까 출정식 공연이 있었다.
리버풀에 함께 가는 팀들이 모여 프리뷰쇼를 가졌다. 바버렛츠, 다이얼라잇, 씽씽, 웨이스티드쟈니스가 함께 했다. 잔다리 페스타, 클럽 프리버드, 그리고 Team WWS의 김도이 씨가 도움을 준 기획공연이다.
잔다리 페스타는 우리를 전담해주겠다는 해외 프로모터 제롬을 만나게 해 준 곳이었고, 프리버드는 2016년 초 한 달 동안 매주 정기공연을 했던 장소다. 도이 씨는 스위머스 EP 타이틀곡 우드스탁(Woodstock)의 뮤직비디오를 찍어주신 분. 우리가 직접 기획한 공연이 아니었는데 여러모로 인연이 깊은 분들과 함께 할 수 있어서 기쁘고 고마웠다.
이 날 이 무대에서 우리는 겨우 마음의 준비를 마칠 수 있었던 것 같다. 지난 몇 주 동안 연습한 결과를 느낄 수 있었던 중요한 공연이었다.
출국날이 기어코 찾아왔다. 오전 10시 15분 비행기로 출국할 예정이었고 멤버들과의 약속 시간은 7시 30분이었다. 곧 죽어도 아침형 인간은 못 되는 나는 생각할 것도 없이 밤을 새우고 새벽에 집을 나섰다. 나 혼자 거의 30분쯤 일찍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우리집이 제일 먼데...
제발 빨리 와달라는 나의 전화에 팀장님은 대체 뭘 하려고 그렇게 일찍 갔냐고 깔깔 웃었다. 전화를 끊은 뒤 나는 체크인을 먼저 시도했다. 원래는 본인들이 직접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기는 했는데, 어찌어찌해서 내가 갖고 있던 멤버들의 여권 사본의 정보만 갖고 세 사람 모두 미리 체크인을 하는 데에 성공했다. 그 사이에 평강이와 선웅이가 도착했다.
기타 하드 케이스, 이펙터 케이스, 의복 등이 담긴 캐리어, 배낭, 보조가방, 카메라 가방까지 내 짐만 해도 혼자 챙기기 힘들 정도였는데 멤버들과 팀장님 짐도 한아름이었다. 기타 2대, 페달보드 2개, 드럼 스네어, 심벌, 맥북, 미니 엠프 2개, 오디오 카드, 마이크, CD와 머천다이즈 굿즈들, 그리고 개인 짐들까지, 우리의 험난한 여정이 이미 눈으로 확인되는 느낌이었다.
실제로 이 짐들은 앞으로 이어질 3주 동안 우리를 가장 심하게 고문한 주범이 되었다. 특히 계단을 오르내릴 때, 나의 캐리어는 내가 도저히 들 수 없는 무게였고 선웅이와 평강이가 계단을 몇 번씩 오르내리며 짐을 날랐다. 다른 것보다도 기타 하드케이스를 가져간 것은 정말 실수였다.
그러니까 여기서 잠깐! 기타 케이스에 관하여
우리처럼 공연을 매일같이 옮겨다니며 하는 투어 팀에게는 기동성이 생명이다. 그걸 다녀와서야 알았다. 가기 전에도 알긴 했는데, 막연한 생각과 겪고 체득한 사실은 온도차가 크다. 투어를 준비할 때 나는 하드케이스 이외에는 옵션이 없다고 생각했다. 스티브 바이처럼 유명한 기타리스트의 값비싼 기타도 비행기 태웠다가 넥이 부러져서 나오는데 나는 그런 위험부담을 가능한 최소화하고 싶었다.
게다가 내 기타인 플라잉 브이 모양이 워낙 독특하다 보니 일반적인 소프트 케이스를 구하기도 어려운데 비행기 수하물로 부치는 것이 가능할 만큼 튼튼하고 검증된 소프트 케이스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나는 틀렸다. 3주간 죽도록 고생하고-사람들을 고생시키고- 돌아와서 불타는 의지의 손가락으로 구글을 검색했더니 있었다.
https://www.amazon.com/dp/B001LNO9IE/ref=psdc_11968331_t1_B00SED137E
불행히도 한국으로는 배송을 안 한다. 하지만 지인을 통해 직구를 하든 주문제작을 하든 어떻게 해서라도 다음 투어 때에는 소프트 케이스를 가져갈 것이다. 아니면 현지에서 차를 렌트하거나!
그리고 비행기를 탔다.
비행
장시간 비행을 대비하는 공항 패션: 반팔티, 겉옷, 트레이닝복 바지, 노메이크업.
그래도 스위머스 티셔츠로 기분은 냈다.
팀장님은 우리와 다른 비행기를 타고 오는 여정이었고, 홍콩을 경유하는 우리 비행기와 달리 직항이라 도착시간이 우리보다 훨씬 빨랐다. 멤버들끼리 셋이서만 가라고 해도 갔어야 할 일인데, 팀장님이 같이 가주시니 괜히 더 기대게 된 것 같다. 꼭 마중 나와달라는 당부는 진심으로 불안하고 걱정되어서 나도 모르게 나온 말이었는데 의도한 것보다 절박하게 들려서 좀 부끄러웠다. 우리는 레이블 대표님을 팀장님이라고 부른다. 우린 한 팀이니까?
대망의 첫 투어를 떠나는 일이고, 준비 기간이 몇 달이나 있었으니 모든 것이 완벽하게 준비된 상태에서 몸 건강 마음 건강한 상태로 씩씩하게 떠날 것 같고 그래야 할 것 같지만 현실은 너무 다르다. 아무리 준비해도 부족하고, 뭔가 빠뜨린 것이 있을 것 같고, 여유가 생기면 그 여유 시간에 뭔가 또 준비하게 된다.
그래서 마지막 날까지 나는 작업을 했고, 새벽에야 맥북 백업을 시작해선 공항 리무진 타기 직전까지 외장하드를 매달고 있다가 엄마에게 토스했다. 그런 일이 생긴다면 엄청난 재앙이겠지만, 혹시라도 타지에서 컴퓨터를 잃어버리거나 망가뜨릴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으니까. 백업 없이 갔다간 그간 작업한 모든 곡들, 발표작과 미발표작 모두를 싹 다 날리게 될 수도 있으니까. 평강이는 앞으로 3주간 결석할 학교 수업 과제에 시달렸고, 선웅이는 그 많은 짐을 몇 번이나 쌌다 풀었다 한 것 같다. 악명 높은 영국 클럽들의 하우스 장비 이야기를 익히 들어서 우리는 모든 드럼 심벌을 챙겼고 간이 스탠드까지 만들어 가져갔다. 수하물 무게도 문제였고 악기가 다치지 않게 포장하는 것도 문제였다. 가방 고르고 포장하고 공항 와서 겉포장하는 것까지 신경 쓸 일이 많았다.
세 시간이나 일찍 공항에 왔는데도 짐 정리하고 포장하고 부치다가 시간이 빠듯해졌다. 그렇게 정신없이 비행기에 올라타서 장장 열일곱 시간에 달하는 비행을 시작했다.
정신없이 자고, 먹고, 영화 보고, 먹고, 음악 듣고, 자고, 먹고, 오목을 두었다. 비행기에서 꼼짝도 안 하고 앉아서 자다가 깨워서 밥 주면 받아먹고, 또 자다가 깨워서 간식 주면 간식 먹고, 이 패턴을 3번 정도 반복하니 좀 사육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안 움직이고 한 자리에 있는 것은 내가 참 잘하는 몇 안 되는 일 중 하나다. 손 닿는 곳에 음악도 있고, 책도 있고, 영화도 있고, 창문도 있고, 심지어 술도 있었다. 그래서 열 시간이든 스무 시간이든, 나는 괜찮았다. 멤버들은 나보다는 조금 더 힘들어했던 것 같다. 평강이는 두 번은 못 타겠다고 했다. 한국 돌아가려면 한번 더 타야 하는데.